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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스포 주의] 그들이 목격한 마지막 환상

번호 1916
초코보 | 검술사 | Lv.80
21-04-19 15:04 조회 10081



※ 5.3 스포일러 주의!

※ 팬픽 정도로만 읽어주세요!

※ ㅇㅁㄹㅌ의 맵 브금을 들으시면서 읽어주시면 더 좋습니다! 



그들이 목격한 마지막 환상


아스러져가는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 따위로 승화되지 못하고 허영의 도시 위에 먹구름처럼 자리 잡았다. 학구열의 뜨거운 불꽃을 사랑한 자들과 생명을 존중하고 필멸과 불멸의 차이점을 깨달은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았던 도시에는 시계 초침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한번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어느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아모르트의 한복판에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아득히 먼 과거에서부터 온 것 같은 이 망령은 자신이 올려다보고 있는 모든 건축물이 단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흘러가고 또 흘러갔군. 아아, 나의 기억도 이 거리처럼 변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테지.」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주먹을 쥔다는 감각은 이 남자에겐 느껴지지 않는다. 그 역시 이 도시가 불러일으킨 미세한 환상이자 최후의 향수였다. 분하고 턱이 바르르 떨렸다. 모든 게 실패했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달 위에서 여러 명의 동포들과 은밀히 진행해왔던 계획과 부단히도 노력해왔던 행위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한 결과였다. 과거에는 자신들이 별의 주인이었으므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초안을 작성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었다. 과거의 망령에 불과한 자신이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대는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삶을 마저 이어나가야 했고 공교롭게도 죽은 자들은 그대로 죽은 자들만의 세계로 떠나야 했다.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아니었다. 남자는 뒤늦게 깨달았다.

「동족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 되돌릴 수만 있다면 미세하게나마 남은 이 힘으로 동족을 파멸로부터 구해 보이겠다… 너무 늦은 건가? 어쩌면 이 도시가 무너질 때 나 역시 이 도시와 함께 무너져야만 했었는지도… 참으로 잔혹한 결말이야….」

거리는 변하지 않았다. 남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정적을 제외하곤 도시는 남자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잎사귀 하나마저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마저도 고향의 것이었다. 남자는 주저앉아 울부짖고 싶었으나 이젠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흘리는 방법을 까먹은 탓이었다.

남자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 세계는 남자가 해온 모든 짓을 처음부터 쭉 지켜봐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죄를 저지르고 신의 대행자를 자처했었던 남자에게 마지막 시간을 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남자는 이 세계가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죽었던 주제에 살아있는 생명처럼 굴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고, 죽지 않은 건강한 육체로 시작부터 끝과의 거리를(불완전한 것들은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기쁘게 질주하는 그들이 내심 부러워졌다.

남자는 어느 의자에 앉아 몸을 쉬었다. 이유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인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 감각이 그들이 느끼는 죽음이라면, 남자는 비로소 이해했다. 고통은 없었고 순백의 세계로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대로 사라질 순 없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몸은 만신창이었지만 아직 누군가의 배웅을 받을 때가 아니었다. 남자에겐 할 일이 있었다. 할 일이 있는 자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거리를 빠짐없이 관찰한 결과 자신이 이 도시에 남은 최초의 생존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게 뻔하니 최초의 생존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드는 생각이었지만 이 남자에게 절실한 것은 동족의 부활이 아니라,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정적을 깨트려 줄 단 하나의 목소리이자 손길이자 존재였다. 남자는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함께 앉아 있는 상상을 했다. 이 도시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을 떠올렸다. 기억할 수 있었다. 기억이 났다.

남자는 몇 분을, 아니 몇 시간…어쩌면 몇 천년 동안이나 의자에 계속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남자의 흥미를 유일하게 끈 무언가의 소리가 이편으로부터 들려왔다. 남자는 이 악기의 소리를 알아차렸다. 허무와 자아비판 등으로 검게 변한 남자의 귀를 아름답게 찢으며 들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피아노 소리였다.

「…소리.」

만약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남자는 지금쯤 온몸에 힘을 풀고, 해야 할 일이 아직 끝마쳐지지 않았음에도 졸음에게 패배하여 사라졌을 것이다. 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소리를 따라 온몸을 그쪽으로 내던졌다. 아직도 이 육체에는 심장이 남아있는 모양인지 남자는 숨을 헐떡였다. 남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존재만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이 이 도시에서 마지막 남은 존재가 아니란 것을 부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빠졌다.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을 부정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피아노 소리는 바로 귀 옆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들려왔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소리의 근원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던 시간이 만약 백 년이라고 치자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세월만 어연 천년 정도가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자는 끝없이,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혼자 두지 마.'

거친 숨과 함께 그는 영혼을 뱉어내면서도 이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남자는 딱 한 번만 더 죄를 짓기로 했다. 그 뒤에 자신에게 내려질 형벌 따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외치고 달렸다. 예순 번 째 넘어지던 찰나, 그리고 예순 한 번 째 일어서려던 찰나 피아노 소리가 남자의 어둠을 찢고 들려왔었던 것처럼 소리의 근원지로 추측되는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빛이 남자의 상처를 감쌌다. 그 빛은 아모로트의 빛이었다.

빛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남자가 조정자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였다. 빛을 찾아낸 남자는 가족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빛을 향해 다시금 몸을 내던졌다.

남자가 마침내 어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쯤,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던, 남자와 안면식이 있는 또 다른 어느 남자가 건반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로 한 건가?」그랜드 피아노 위에는 장미가 한 송이 놓여 있었고 그 장미를 중심으로 크리스탈의 푸른빛이 둥근 원 형태로 감싸고 있었다.

「…당신이 어째서.」남자는 처음엔 주저앉더니 이윽고 쓰러졌다. 소리의 근원지에 도달했으므로 의무를 다한 남자의 몸은 더 이상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번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파멸로부터 동족을 구해내는 데 쓰겠다고 맹세한 이 힘을 이용해 남자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지? 참 재주가 많은 놈…이다.」

에메트셀크는 쓰러져서 말하는 것도 힘든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가 해왔던 일은 에메트셀크도 했었고, 남자가 바라왔던 소망은 에메트셀크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도 하데스가 되어 이방인들과 맞섰고 끝내 패배하고 사라졌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빛의 전사가 되어 이방인들과 맞섰다. 최후의 최후…그 너머의 최후까지 싸웠으나 패배했다. 패배한 존재들끼리, 과거의 망령들끼리 드디어 조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남자는 에메트셀크를 향해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냄과 동시에 아직 사라지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슬픈 눈길을 건네었다. 에메트셀크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 알아. 너도 나에게 할 말이 많겠지. 나도 가려던 길 심심해서 잠시 기다렸을 뿐이다. 네 불만을 들으면서 마지막 길을 소란스럽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에메트셀크는 흘러내린 흰색 앞머리를 위로 걷어올렸다. 그러고선 귀찮다는 듯이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은색 부분의 머리카락을 긁었다.

「기껏 기다려줬는데 그 표정은 뭐야? …나 참, 끝까지 봐주려야 봐줄 수도 없는 귀찮은 녀석이라고, 넌.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됐어. 서로 실패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그래, 넌 일어서기도 힘들어 보이네. 위대한 조정자 님께서 엎드려 있는 꼴하곤…덕분에 처음으로 웃었다.」

「…시…끄러워」

에메트셀크는 피아노 뚜껑을 덮곤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도와주도록 하지.」

남자는 에메트셀크의 부축을 받는 도중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러나 저라나 남자도 그렇고 에메트셀크도 환영의 잔존이었다. 끝까지 남을 조롱하며 특유의 비관적인 태도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에메트셀크도 이 남자를 기다리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써버린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가 오기 전부터 먹구름이 낀 도시를 둘러보며, 남자가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 몇 천년을 보냈을지도 몰랐고, 남자처럼 걷고 또 걷다가 우연히 버려진 피아노를 발견하곤 그 피아노를 수리하는 데 또 모든 힘을 써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메트셀크의 영혼에도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게 만사 귀찮다는 듯한 표정.

「…집으로 갈까.」

에메트셀크는 남자를 부축하고 환영의 도시가 있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랜드 피아노와 그 위에 놓인 장미꽃이 그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에메트셀크는 엘리디부스를 기다리기 위해 한 번도 내디딘 적 없는 길을 향해 과감히 내디뎠다. 그런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듯 의기양양해 보였다. 죽으러 가는 길이 슬프게 느껴졌다. 에메트셀크의 부축을 받은 엘리디부스도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이 도시에 자신이 마지막 남은 생존자가 아님을 부정할 수 있었다. 이제 뒤를 돌아봐도 그랜드 피아노와 장미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모로트는 언덕 저편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엘리디부스는 에메트셀크에게 불만을 쏟아내었고 에메트셀크는 귀를 후벼파면서 엘리디부스의 불만을 감내했다. 곧이어 마지막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아모로트도 아니었고 그랜드 피아노와 장미꽃이 있었던 그때의 그 공간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 그리고 넓은 문이 한 개 있었다.

에메트셀크와 그의 부축을 받은 엘리디부스가 문 앞에 도착하자 문은 경비원도 없이 자동으로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며 내부에 응축되어 있었던 빛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 둘을 감쌌다. 마침내 그 둘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본 뒤, 문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에메트셀크는 문을 넘어가면서도 나머지 손을 들어 올려서 검지와 중지를 부딪쳤다. 청량한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들리고 난 뒤, 고장 났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마침내 아모로트를 이룬 건축물 사이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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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나 (21-04-24 10:13)
카벙클 | 비술사 | Lv.80
원형 아씨엔이 갔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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