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스토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특별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푸른 용기사가 과일이나 따려고 점프를 쓰다니....... ......뭔가 회의감이 들려고 하는군.” 이런 혼잣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알피노 르베유르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포르탕 저택에 마련된 알피노의 개인실. 용시전쟁이 끝나고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이 성도 이슈가르드를 떠난 후 며칠이 흘렀다. 한밤중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한 알피노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목제 책상에 앉았다. 자신의 허영심과 교만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그날. 용머리 전진기지를 관할하는 오르슈팡 공의 말에 마음이 동해 쓰기 시작한 수기를 펼친다.
“알피노 공....... 당신은 이대로 부러진 ‘검’이 될 생각인가?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울다하에서 이슈가르드로 달아나 용시전쟁에 얽히게 된 여행길에서 알피노는 희미하게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오르슈팡 공이 눈의 집이라 부르던 곳에서 해준 말을 떠올리며 겉치레만 요란했던 당시 자신의 모습에 알피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르슈팡 공은 빛의 전사인 영웅을 ‘친구’라고 불렀다. 영웅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그때, 오르슈팡 공은 영웅을 돕고 그 영웅의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대해주었다. 알피노는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그의 도움을 받았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직접 전할 수 없게 되었지만, 며칠 전 알피노는 이슈가르드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커르다스 언덕에서 오르슈팡 공에게 다시금 그것을 보고했다. 수기를 다음 장으로 넘긴다. 빛의 전사,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 얼음의 무녀 이젤 그리고 자신이라는 기묘한 조합 4인의 여행길은 알피노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의 연속이었다. “말은 쉽지, 알피노....... 네가 직접 그나스족 야만신과 싸운다면 모를까, 야만신 토벌은 결국 ‘빛의 전사’한테 떠넘길 거잖아?” 그나스의 토굴집에서 에스티니앙이 한 이 말은, 떨쳐버렸다고 믿었던 자기 안의 오만함을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알피노에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조부인 루이수아 외에는 여동생 알리제 정도였다. 그 알리제조차 자신이 마음 속 어딘가에서 그녀를 얕봤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깨닫게 되었다. 크리스탈 브레이브 사건 이후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노라고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꼴이다. 무엇보다 빛의 전사인 영웅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알피노의 무기는 두뇌와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루이수아의 손자라는 ‘혈연’에 의해 힘을 갖게 된 무기다. 알피노 스스로 힘을 키운 게 아니다. ‘루이수아의 손자’가 한 말인지, ‘알피노 르베유르’가 한 말인지는 결정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자신의 수족을 움직여 실제로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동료들에게 나는 믿고 따를 만한 존재인 걸까? 그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말은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감사하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믿어주지 않으면 이전의 자신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땐 야만신 라바나를 토벌하러 간 영웅과 이젤이 돌아오기까지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자신은 빛의 전사를 무적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에스티니앙이 한 말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하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만은 없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알피노는 본격적으로 마법 단련을 시작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마법 훈련은 했지만, 그건 실전이 아닌 공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젤이 힘을 실어준 덕도 크다. “알피노는 마법에 소질이 있다. 실전을 통해 실력을 쌓으면 좋은 마도사가 될 것이야.” 이젤이 영웅에게 한 말이 알피노에게 용기를 주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다, 진정한 동료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알피노 스스로 내딛게 되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다시 멈춘다. 드라바니아 구름바다. 하얀 궁전을 앞에 두고, 마지막 야영을 한 날의 일기이다. 이젤이 만들어 준 스튜는 무척 따뜻하고, 지금까지 먹어본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여행 중 배운 장작 줍기. 에스티니앙조차 애를 먹었던 구름바다에 사는 모그리족과의 만남. 드래곤족과의 대화....... 그리고 빛의 전사는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알피노는 이 여행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알게 되었다. 이젤과 에스티니앙은 자신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지함에서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미래를 맡겨준 이젤에게 할 대답이기도 하다고, 알피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피노 공, 아직 안 주무시나?”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이어,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고 있던 수기를 덮고 가보니 램프를 든 에드몽 전 백작이 나타났다. “오늘 밤엔 좀체 잠이 오질 않아 차라도 마시려고 했더니, 문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군. 선잠을 자다가 한기가 들진 않을까 싶어 와봤다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알피노도 생각이 많아 잠들지 못했다 하니, 에드몽 경은 자기 방에서 담요를 가지고 나와 괜찮다는 알피노에게 따뜻한 허브티를 끓여주었다. 니메이아 백합의 뿌리를 우려낸 차라고 한다. 다루기 어려운 식물이라 하던데, 에드몽 경의 의외의 면을 본 것 같다. 거듭 감사 인사를 하자 전 백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곧 이곳을 떠나겠지?” 에드몽 경은 대답하려는 알피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좋은 표정을 짓게 되었군, 알피노 공.” 에드몽 경이 타 준 허브티를 마신다. 쓴 맛이 나는 니메이아 백합의 뿌리는 그대로 끓이면 써서 마실 수 없다. 하지만 당밀과 섞어서 쓴 맛이 연해졌다. 전 백작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알피노는 문득 생각했다. 니메이아 백합의 꽃말이 뭐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다. 수기는 계속된다. 매의 보금자리에서 열린 인간과 용이 만드는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을 식전은 사룡의 그림자에 홀린 에스티니앙의 난입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용시전쟁의 진실이 드러나 혼란에 빠져 있던 성도가 진정되고,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미래로 겨우 눈을 돌라자마자 생긴 일이었다. 붉게 물든 용기사 갑옷. 그 갑옷에 눌어붙은 사룡의 두 눈. 비록 친구일지라도 백성을 위해 에스티니앙에게 활을 겨눈 아이메리크 경은 분명 옳다. 하지만 알피노는 에스티니앙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눈의 집에서 그렇게 고백한 자신에게 영웅은 조용히 미소 지어주었다. 친구를 구하자고. 그 후, 용의 눈과 대치했을 때 느낀 에테르에 대해서는 영웅과 자신만 알아두기로 했다. 그걸로 됐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모든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만이 남았어.” 아이메리크 경의 귀족원 의장 취임 식전이 끝난 뒤, 에스티니앙은 이 말을 남기고 병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붉게 물든 용기사 갑옷을 남겨둔 채. 정말 그 사람답다. 알피노를 직시하고 가차 없이 말을 퍼붓던 에스니티앙. 그 사람은 결코 알피노를 신분이나 핏줄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그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해준 어른인지도 모른다. 알피노는 자신이 그를 형처럼 따르고 있음을 느꼈다. 새로운 여행이 다가오는 동안, 알피노는 수기를 가지고 이슈가르드 각지를 돌았다. 혼자 여행을 하며, 살아남은 사룡의 졸개들에게 몇 번인가 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마법을 단련해둔 게 도움이 되었다. 영봉 솜 알 정상에서 드라바니아 구름바다를 내려다 보았을 때의 감동. 압도적인 존재였던 성룡 흐레스벨그와의 해후....... 다시 떠올려 봐도 다리가 떨린다. 성룡의 입을 통해 용시전쟁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사태는 급변한다. 사룡을 토벌한 영웅과 에스티니앙, 이슈가르드 교황청에서 벌어진 비극, 그리고 마대륙 아지스 라의 하늘에서 빛난 이젤의 마음....... 아지스 라에 들른 알피노는 그 날, 그 섬에 내려섰던 그 장소에 꽃 한 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니메이아 백합 꽃다발. 에스티니앙이 놓고 간 것이리라.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상이 다른 네 사람이 시작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함께 하면서 진정한 여행 동료가 되었다. 이젤의 마음에 이끌려 그 사람은 앞으로 자신을 위해 여행을 하겠지.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는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알피노는 허브티를 다 마시고는 수기를 덮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잠이 들려는 순간, 그는 그것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진혼의 꽃이라고도 알려진, 별의 신 니메이아의 이름을 딴 꽃. 별은 여행자에게 길잡이가 된다. ‘무사히 여행하기를’. 그것이 니메이아 백합의 꽃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