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못다 한 이야기

패치 V6.0 효월의 종언 메인 스토리의 내용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메인 스토리를 완료하지 못한 분께서는 주의 부탁 드립니다.

「푸름은 꿈에 녹아 사라지고」

습관이란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과거 성도 이슈가르드에서 최강의 용 사냥꾼이라 불린 남자 에스티니앙 발리노. 그에게는 아직 버리지 못한 습관이 있다. 용기사 투구를 내려놓은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틈만 나면 단련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칠대천룡 중 하나인 니드호그에게 가족을 잃은 뒤로, 그는 복수할 힘을 기르기 위해 혹독한 훈련의 나날을 보냈다. 장성해서 스승 곁을 떠난 뒤에도 스스로 단련하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엄하게 채찍질하지 않았더라면 강대한 용과 맞서 싸웠을 때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생긴 습관도 있다. 반주도 그중 하나다. 일찍이 용과의 싸움에 인생을 바쳤던 시절의 그였다면 가령 쉬는 날이라 해도 -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가지 않는 한 -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용시전쟁이 종결된 후에 방랑 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날이 서 있던 마음도 다소 풀어진 듯하다. 비상시라면 모를까, 평온한 하루의 끝자락에 마시는 술 한 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 끝 원정에서 돌아온 후, 라자한의 태수 브리트라의 권유로 사베네어 섬에 머물고 있던 에스티니앙은 이날도 단련을 끝내고 홀로 객실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안주는 현지 어부에게 산 마른오징어. 맛은 동방산에 절대 뒤지지 않았으나, 잔에 따른 내용물이 현지 명산 증류주였던 것이 문제였을까? 유능하기로 소문난 라자한의 연금술사가 만든 술은 너무 빨리 취한다. 금세 취기가 돌았고 기분 좋게 노곤해진 에스티니앙은 잠에 빠져들었다.

선잠을 거쳐 들어간 깊은 꿈속, 남자는 용과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내지르는 포효에서 증오와 살기를 느낀다. 사룡 니드호그의 눈에서 힘을 끌어내 싸우는 ‘푸른 용기사’는 용이 마력을 실어 내지르는 포효에서 그 속에 담긴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빨을 드러내며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용을 피해 하늘로 뛰어오른 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며 손에 든 창에 눈에서 끌어낸 마력을 싣는다. 그리고 마치 유성처럼 몸에 빛을 두르며 내려온다. 목표는 목 부근, 목등뼈의 틈. 그곳을 꿰뚫으면 제아무리 강인한 용이라도 해도 무사할 수 없다. 충격과 함께 창끝이 단단한 비늘을 뚫고 살을 찢었다. 그 직후, 창에 응축된 마력이 폭발하면서 불꽃을 튀기며 뼈를 부순다. 잡았다, 느낌이 왔다. 용은 고통스럽게 포효하며 몸을 크게 흔들어 용기사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용의 목숨이 다하고, 그 거대한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승자가 된 용기사도 남은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은 용의 등에서 내려와 한숨을 돌린 것도 잠깐, 가슴 쪽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이 극심한 통증의 원인을 알고 있다. 힘의 원천으로 이용해 온 사룡의 눈이다. 막대한 마력과 함께 니드호그의 원념이 담겨 있는 그것은 ‘푸른 용기사’에게 절대적인 힘을 주는 반면, 서서히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이대로 가면 육체를 빼앗겨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이른바 사룡의 그림자가 된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어떤 직감이 불길한 미래의 방문을 고하고 있었다. “닥쳐, 니드호그……!” 간신히 쥐어짜듯 저항하니 통증은 다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몸에 미치는 모든 영향을 억누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발작의 강도도 빈도도 매일 더해갈 뿐. 아무리 생각해도 한계였다. “슬슬 끝내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군……” 용기사는 방금 쓰러뜨린 용의 사체에 기대어, 잠시 쉬기만 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질척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용기사는 어딘가의 건물로 옮겨져 있었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깔린 짐승 가죽 위에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몸을 반쯤 일으켜 실내를 둘러보니 테이블 몇 개와 의자, 그리고 긴 카운터가 보였다. 짙게 밴 와인과 고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이곳은 술집인 듯하다. “아버지! 그분이……!”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거친 발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이 뛰어 들어왔다. “할드라스 님!” 그렇게 불리자 비로소 에스티니앙은 꿈속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용장군 할드라스…… 부왕 토르당과 함께 칠대천룡 라타토스크를 물리친 이슈가르드 건국의 영웅. 사룡 니드호그에게서 빼앗은 두 눈을 힘의 원천으로 삼고 사상 최초로 ‘푸른 용기사’가 된 인물이다. 꿈속에서 그는 할드라스가 되어 있었다. 상황을 받아들이니 기억이 좀 더 선명해지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정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오르니카르 경인가?” 오르니카르 드 코르디유로― 토르당 왕을 모시는 열두 기사 중 한 명이었으나 사룡 니드호그를 물리친 전투 후에 기사 신분을 반납하고 하야한 인물이다. “더 이상 경이라고 불릴 만한 신분이 아닙니다. 주군. 지금은 그저 보잘것없는 술집 하나 꾸리고 있습니다.” 그 전투 후 20여 년, 할드라스는 고향인 이슈가르드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계속 용과 싸웠다. 그래도 음식이나 기타 물품을 구하러 변방의 마을에 들를 때가 있어 옛 전우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은 있다. 오르니카르가 술집 주인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래, 그 술집이 여기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 역시 자네의 주군이 아니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여기에……” 그러자 오르니카르는 옆에 있던 젊은 흑발 여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틀린…… 제 딸아이입니다. 훈련 중에 용의 사체 옆에 쓰러져 있는 할드라스 님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 녀석,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전기사가 되고 싶다면서 창 같은 걸 휘두르고 있거든요.” 아버지 말이 끝나자 베르틀린이 긴장하며 말을 잇는다. “할드라스 님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용 사냥꾼이 되고 싶어서 늘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리는 이유는, 눈동자에 깃든 반짝거림이 젊은 시절의 자신들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아주 오래전에 그가 잃어버린 빛이다. “그런 분이 정신을 잃으신 것을 보고…… 바로 신전기사단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 했지만, 가위에 눌린 듯이 앓으시면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말씀하시길래 여기로 모셨습니다.” “기력을 다한 나를 발견한 것이 사룡의 권속이 아니라 옛 전우의 딸이라니 어찌 이런 행운이……” 하지만 베르틀린의 대답은 행운이라는 말로는 넘겨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할드라스 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목소리 덕분이었습니다.” “내가 신음이라도 냈나?” “아뇨……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에 울리는 거친 바람 소리 같은……” 아아,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할드라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 만남을 인도하신 전쟁의 신 할로네에게 감사했다. 이 부녀라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것이리라. 할드라스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베르틀린, 네가 들은 것은 이 눈이 발하는 사룡의 의지다……” 그의 은빛 갑옷의 가슴팍에는 기이한 물체가 박혀 있다. 용의 눈이다. 사룡 니드호그에게서 도려낸 그것이 갑옷에 엉겨 붙어 꺼림칙한 빛을 내뿜고 있다. “눈은 힘을 원하는 자에게 말을 건다. 정신을 갉아먹고 마음을 지배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역시 지금이라도 신전기사단 병원으로……!” 다가오는 베르틀린을 손으로 막으며 할드라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소용없다……. 이미 용의 눈은 몸에 엉겨 붙어 갑옷을 벗는 것조차 쉽지 않아. 마음을 강하게 먹고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 왔지만, 사룡 녀석, 몸을 빼앗기로 한 것 같더군…….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니드호그의 원념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될 테지.” “어찌 그런……” 할드라스는 말문이 막힌 오르니카르를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친구여, 이 목숨을 끝내 다오……” “말도 안 돼! 나더러 당신을 죽이라고?” 평민 출신인 오르니카르는 안 그래도 어설픈 존댓말 사용이 흥분하면 완전히 무너진다. 그 모습이 오랜만이라 할드라스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지만, 그럼에도 간곡히 부탁했다. “비정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발 들어주게……. 내가 이대로 꼭두각시가 되면 사룡은 반드시 날 조종해서 눈을 되찾으려 할 거야. 그 결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두 눈을 모두 잃고도 건재한 사룡 니드호그는 이슈가르드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선왕 토르당을 대신해 새로운 지도자가 된 교황이 신전기사단을 결성하고, 귀족들과 힘을 합쳐 싸우면서 간신히 용의 침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니드호그가 눈을 탈환해 과거의 힘을 되찾으면 전쟁 국면은 단숨에 악화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 알지만…… 당신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유일한 남자라고!” “인간은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이고, 어머니 별을 수호할 자는 환룡의 자식인 칠대천룡뿐. 그것이 니드호그의 진의라는 걸 알았을 때, 우리 모두 결심하지 않았나.” 할드라스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말을 이었다. “인간의 시대를 지키기 위해 우호 관계에 있던 용을 배신하고 천룡을 치기로……. 한 번 그 죄로 물든 이상, 이제 와 돌이킬 수는 없어. 아무리 검을 내려놓고 술집 주인 행세를 해도, 정작 자네의 딸은 창에 손을 뻗고 있지 않은가.” 시선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버지를 떠나 그 딸을 향한다. “용 사냥꾼이 되고 싶다고 했나? 사룡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너라면 눈을 맡길 수 있을 것 같구나. 이 눈에서 힘을 끌어내는 용기사가 되어 성도 이슈가르드를 지켜다오.” 베르틀린은 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용기사가……?” “그래. 성도 이슈가르드를 위한 정의로운 마음이 있는 한, 푸른 용기사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을 유지하더라도 육체는 서서히 무너지지.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나처럼 되기 전에 다음 세대 용기사에게 눈을 맡겨라. 용의 수명은 길다. 전투는 후세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각오하도록……” 여기까지 말하다가 할드라스는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어서 해라, 오르니카르! 과거 내게 맹세했던 충성이 진심이라면…… 부탁한다……!” 가슴을 뒤로 젖히며 격렬한 고통을 견디는 할드라스의 모습을 보고 부녀는 이제 고민할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니카르는 떨리는 손으로 할드라스의 애창을 손에 들고는 그 창끝을 주군의 가슴에 갖다 댔다. 하지만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불량배나 다름없던 자신을 거두어 친구로, 기사로 이끌어준 은인 할드라스를 어찌 죽일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함께 창 자루를 잡았다. “아버지의 죄를, 저도 같이 짊어질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각오를 다졌다. 할드라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간신히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잘 있거라, 친구여. 고맙구나, 다음 시대의 용기사여. 언젠가 용과의 싸움에 끝을……” 수많은 용을 도륙해 온 창이 그 주인의 심장을 관통했을 때, 갑작스럽게 꿈은 막을 내렸다.

눈을 뜬 에스티니앙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고는 방의 구석에 세워 놓은 자신의 창을 바라보았다. 니드호그, 원수의 이름을 붙인 마창이다. “나에게 대체 뭘 보여준 것이냐……” 과거에 그는 니드호그의 두 눈을 손에 넣었다가 정신과 육체를 지배당해 사룡의 그림자가 된 적이 있다. 그 두 눈 중 하나는 썩지 않는 시체가 되어 버린 할드라스의 유해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방금 꾼 꿈은 그 눈을 통해 전해진 선조들의 마음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이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에스티니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밤바람을 쐬려고 창문을 열었다. “끝났어. 당신의 소원은 천년 후에 이루어졌다고.” 창밖에는 용과 사람이 함께 사는 다채로운 도시, 라자한의 야경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