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반역자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그 이름에 소망을 담아
이곳 림사 로민사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녀석일수록 흰색을 몸에 걸치지. 그래야 거리에 잘 녹아 들거든. 머리색이 흰색인 넌 날 때부터 악당에 적격이었단 소리야―― 아직 앳된 모습이 남은 어린 산크레드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남자는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는 아니다. 철들기 전 부모에게 버림받아 거리에서 살아온 소년과 그를 헐값에 고용해 악행에 가담시키려는 상인…… 단지 그뿐인 관계다. 때는 아직 멜위브의 해적 금지령이 선포되기 전. 강한 힘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이 바다의 도시에 상인을 노려보며 아무 말 없이 분을 삭이는 소년을 염려해주는 이는 없었다. 악랄한 고용주가 있는가 하면 조금은 나은 고용주도 있었다. 쉬운 일을 받아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 다음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의뢰 받은 일이 끝나면 끊어지는 인연…… 그런 관계를 거듭하면서 산크레드는 성장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에겐 탁월한 재주와 민첩성, 뛰어난 기지가 있었기에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해적들조차 두려워하는 ‘규율’의 파수꾼, 도적 길드에 붙으면 편해질까 싶어 협력하기도 했지만, 그곳에 적을 둘 생각은 없었다. 그들 안에 내밀히 불타는 긍지심과도 같은 그것은, 산크레드에게는 함께 나누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떠돌이와 다름 없던 그의 생활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게 된다. 원양어선이 들어오던 그날, 산크레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두에서 한 건 올릴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도둑질이다. 그리고 기품 있어 보이는 어떤 노인의 짐에 손을 대다가…… 되려 호되게 당하고 만다. 마법으로 손발이 묶이고 하얀 돌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관청에 잡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사람을 부르기는커녕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하는 구경꾼을 흩어지게 하더니, 너무나도 살갑게 산크레드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내 이름은 루이수아 르베유르라고 하네. 지식의 도시 샬레이안에서 연구를 위해 이곳에 왔지. 자네 이름은?” “……산크레드.” “성은 뭐지? 가족은 어디 있나?” “없어…… 몰라…….” 루이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몹시 중요한 사실을 밝히듯이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산크레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타고난 민첩함과 재주를,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써보는 게 어떤가. 그것이 언젠가 자네를 행복하게 할 걸세―― 산크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찌푸린 얼굴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난처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루이수아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샬레이안으로 가서, 그 재능을 살릴 방법을 배우도록 하게―― 이렇게 해서 산크레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이수아는 그에게 임시로 ‘워터스’라는 성을 주었다. 하천과 지식을 관장하는 살리아크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샬레이안에서 ‘물’은 지혜의 상징이다. 산크레드가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는 루이수아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산크레드를 첩보 활동의 명수에게 맡기기로 했다. 끊임없이 세상의 지식이 모여드는 샬레이안 본국에서는 첩보 기술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 길이라면 산크레드의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산크레드 역시 일찌감치 자신의 입지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은밀한 행동을 위한 신체 기술은 물론, 어떠한 환경에도 잠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몸가짐과 지식을 최대한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그에게서 거리 생활을 하던 소년의 면모가 사라지고, 누구에게든 접근해 환심을 살 수 있을 만한 초연한 청년의 모습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목덜미에는 탁월한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아 ‘현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문신이 새겨졌다. 오랜만에 만난 루이수아는 그것을 몹시도 기뻐했다. 당시엔 아직 ‘아실리아’라 불리던 소녀와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루이수아가 결성한 ‘구세시맹’의 일원이 된 산크레드는 에오르제아에 점차 전란이 다가올 조짐이 보이자 밀명을 띠고 울다하에 와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검술을 배우기 위한 유학이었지만, 실제로는 야만신에 대한 지식을 협상카드로 내밀며 국가의 중심부에 접근해 급격하게 국력을 키우고 있는 갈레말 제국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비참한 ‘사고’로 인해, 그 소녀는 산크레드의 눈앞에서 천애고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유해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아실리아를 봤을 때의 감정을 어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린 소녀가 딱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고, 그럼에도 “갖은 수를 써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도 같다. 그게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기술을 익히고도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그저 좌절한 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형용하기 어려운 그 감정은, 그럼에도 하나의 단어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원통함이었다. 하지만 아실리아에게는 다행히도 프라민이라는 보호자가 생겼다. 사실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는 산크레드가 그녀에게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제국군의 이중 첩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적어도 당시의 산크레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우선해야 할 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지만 울다하에 있을 때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러 갔고, 그녀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사전에 ‘골치 아픈 작자들’을 손보러 가기도 했다. 그 상대가 길거리 불량배 정도면 다행이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인지 그녀 주변에서 어슬렁대는 제국 스파이를 발견했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 산크레드는 아실리아에게 당분간 다른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네 머리 색처럼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아실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어떤 이름이 좋겠어?”라고 산크레드에게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산크레드는 ‘민필리아’라는, 고원 부족치고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흔하지는 않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언젠가 루이수아에게 받은 자신의 성처럼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진 않았지만, 온종일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자신을 대신해 그녀를 보호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아실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 이름을 받았다. 어느 날 밤, 정보도 수집할 겸 술집으로 향하던 산크레드는 어스레한 울다하의 길을 걷는 민필리아를 발견했다. 곡괭이를 지고 있는 걸 보니 채굴하고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민필리아, 어쩐 일이야? 평소엔 조금 더 빨리 끝나지 않아?” “어머, 산크레드. 오늘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좀 늦게 끝났어.” 어깨를 으쓱하는 민필리아에게 “데려다 줄게”라고 말한 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민필리아와 프라민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은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오늘 있었다던 문제의 자초지종을 듣기도 하고 최근에 들은 시시껄렁한 소문 이야기에 웃기도 하다 금세 도착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이제 술 마시러 가는 거야?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너무 취하면 금세 여자들한테 집적대잖아……” “네네...... 단단히 새겨 듣지요.” 산크레드의 성의 없는 대답에, 민필리아는 “어휴!”하면서 토라지고는 문을 밀어서 열었다. 안에서 따뜻한 주황색 빛이 퍼져 나와 산크레드와 어두운 길을 함께 비추었다. 민필리아가 손을 흔들며 그 빛 속으로 사라지자—— 찰나의 정경을 가르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이 닫혔다. 조금 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어머, 이제 오니?” 다시 어두워진 길에서, 산크레드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거의 어둠에 녹아 들어, 표정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미적미적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저 문 너머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 역할은 기껏해야 그녀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니까. 그것은 사사로운 그의 고집이면서—— 그럼에도 깰 수 없는 그의 긍지였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산크레드는 사정이 있어 제1세계로 왔고, 지금은 환락도시 율모어의 지하실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이곳에 유폐되어 있다고 하는 어떤 소녀를 구출하기 위해서다. 이 도시의 건물들은 하얀 암초로 지어져 있어, 아닌 줄은 알지만 림사 로민사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자신을 고용했던 악덕 상인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녀석일수록 흰색을 걸치지.” 산크레드는 변장을 위해 입고 있던 율모어 군의 갑주를 벗고 순백색 코트로 갈아입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강화섬유로 만들어져 온갖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이 코트는, 쌍검에서 건블레이드로 바꾸면서 방어 역할을 하게 된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수한 장비였다. 흰색을 선택한 건, 빛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보호색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떳떳한 기사였다면 일부러 칠흑 같은 검은색을 걸치고 이 도시에 정면으로 대치했을까? 하지만 그는 바로 생각을 바꿨다.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결과다. “그녀”를 어떻게든 구해내야 해. 율모어를 형성하고 있는 거대 암초는 물론 바다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뚫어서 만든 넓은 지하 공간은 어떤 시대에는 비축 창고로, 또 어떤 때에는 죄식자를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대피소로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우스리가 원수로 취임한 이후 현재는 감옥이자 메올을 비롯한 식량을 쌓아두는 저장고로 쓰이고 있다. 그 가장 안쪽 끝에 소녀의 방이 있다는 건 사전에 면밀한 조사를 통해 알아냈다. 산크레드는 감시의 눈을 피해 안쪽으로 진입하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방해가 될 법한 자는 미리 졸도시킨 뒤 얼마간 움직일 수 없도록 포박해 두었다. 사실 아무리 율모어의 경비가 엄중하다 해도, 혼자서 드나드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면…… 게다가 그 대상이 아마도 전투 경험조차 없을 소녀라면, 난이도가 한층 높아질 터. 그가 제1세계에 온 뒤 작전을 결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건블레이드 수련을 포함해 ‘둘이서’ 탈출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번째인지 모를 파수병 처리를 끝내고, 산크레드는 드디어 방 앞에 이르렀다. 이 안에 있는 소녀는 제1세계 사람들에게 ‘빛의 무녀 민필리아’라 불리고 있지만, 산크레드가 알고 있는 그녀 그 자체는 아닐 것이라고 수정공은 말했다. 하지만 실낱 같은 부분이라도 그녀에게 닿아 있다면 ―― 난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산크레드는 작게 숨을 내쉬고 재빨리 문에 걸려 있는 열쇠를 풀었다. 그 방은 너무나도 평범하여 도리어 이상해 보였다. 간소하면서도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작은 수납장. 한 벌로 된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공부라도 하고 있었는지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책장이었다. 종류별로 빼곡하게 빈틈없이 책이 꽂혀 있었다. 지하라서 창은 없었으나 불만으로 여길 만한 건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겨우 붙잡은 ‘빛의 무녀’를, 절망도 희망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사육하기 위한 장소라는 걸. 방 가운데에 있던 소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방문객을 향해 수정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있었다. “누, 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목소리는 산크레드가 아는 민필리아하고도, 어린 아실리아하고도 달랐다. 무의식 중에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애써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여길 나갈 거다…… 민필리아.” 그 이름에 담긴 소망을 떠올린다. 그날, 내 눈앞에 분명히 존재했던 소녀의 미소를 떠올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잊지 않겠노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마음속에 새긴다. 그렇게 내민 손을, 소녀의 작은 손이 주저하며 잡았다. ――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인연에 이름은 아직 없다.
흑역사의 기만
쿠가네의 가장 큰 술집 ‘시오카제 정’의 한 모퉁이. 함께 있는 것이 기묘한 느낌마저 드는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빨리 인정해, 나랑 같이 오길 잘했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녀석의 말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남자는 안주에 손을 뻗는다. 오징어를 햇빛에 말린 것인데 ‘오징어포’라고 하는 모양이다. “조용히 해, 꼬마. 애초에 네가 가져온 정보가 정확했더라면 이런 고생은 안 하잖아.” 불에 구운 오징어포를 물고 있는 남자, 에스티니앙이 노려보는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흰 비늘을 가진 어린 용, 이름은 온 카이라 한다. 과거 ‘푸른 용기사’라 불리며 용 사냥을 계속해 왔던 남자와 어린 용이 어째서 이렇게 먼 동방까지 와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단 말인가. 다소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시간은 조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리트 전장에서 위기에 빠진 영웅을 구출해낸 에스티니앙은 혼수상태에 빠진 ‘친구’를 이슈가르드 진영으로 보낸 뒤, 그가 깨어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창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별 재주도 없는 자신이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될 터. 다시 전선으로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듣자 하니 황태자 제노스가 철수하고 난 뒤 제국군의 움직임도 고착 상태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할까―― 그때 잠시 들른 커르다스 설원에서 그를 불러 세운 것이 온 카이였다. 묘하게 붙임성 있는 이 어린 용은 천 년 전에 자취를 감춘 아버지의 짝을 찾기 위해, 예의 그 영웅과 동방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에스티니앙과 함께 싸운 적도 있었다. 온 카이는 그를 보자마자 여행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이유인즉슨 지난 동방 여행을 하고 난 뒤 모험에 매력을 느껴, 함께 여행할 친구를 찾고 있었다는 거다. “어린애 뒤치다꺼리 할 일 있어?” 에스티니앙은 쌀쌀맞게 거절했다. 하지만 온 카이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에스티니앙에게 나이를 묻고 나서 뽐내듯이 “난 그것보다 10배는 더 살았으니까 어린애 뒤치다꺼리는 내가 해야 할 거 같은데?”이라며 웃어대는 꼴이란. 계속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구니 점차 머리가 지끈거린다. “푸른 용기사는 그만뒀지만, 오랜만에 용을 사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반 농담으로 창을 들이밀었더니 온 카이는 너무나도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바로 그거야!” 온 카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짝을 찾아 헤매던 그 여행 도중에, 예로부터 동방에서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청룡’이라 불리는 용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 용은 ‘동방의 수호신’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악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청룡에 대한 소문을 확인해보자! 만약 사람을 잡아먹는 나쁜 용이라면 가만 놔둘 수는 없잖아!” 이렇게 해서 푸른 용기사와 어린 용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정보를 모아보니 ‘청룡’이라는 존재는 뱀의 화신일 뿐, 그들이 생각했던 드래곤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워낙 금전 사정에 신경을 안 쓰고 노잣돈을 모두 써버린 탓에 두 사람은 변변한 밥 한 끼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술집에서 술과 안주를 먹고 있느냐면, 술집 주인이 온 카이를 보더니 ‘운수 좋은 동물’이라고 기뻐하며 가게에 손님을 끌어다 주는 조건으로 식사와 침상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빨리! 나랑 같이 오길 잘했다고 말 안 하면 오징어포를 안 구워줄 거야!” 시건방진 어린 용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안주도 없이 쓴 청주를 마시는 건 더 고역이다. “알았으니까 어서 불이나 뿜어봐.” 오징어포를 찢어서 내밀자 온 카이는 불꽃 숨을 내뿜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서 오징어포가 노르스름하게 변한다. 자, 한 입 더. 가게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온 카이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에스티니앙도 슬쩍 입 모양을 맞춘다. “어서 오십시……” “여기 있었군용……!” 분홍색 동방 의상을 입은 여성, 타타루 타루가 외쳤다. 그 옆에 있던 특이한 후드를 쓴 여성, 쿠루루 발데시온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터져나올 듯한 웃음을, 어떻게든 겨우 참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용기사단에서 물러났다고는 들었지만, 술집 점원으로 재취업한 줄은 몰랐네.” 되받아칠 말이 없다. 그뿐 아니라 안 좋은 예감이 든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다. “그럼 난 가볼게, 온 카이. 이 가게에 있으면 굶어 죽진 않을 거야. 잘 지내라!” 에스티니앙은 갑주 한 벌을 담은 마대자루를 흉흉한 창 끝에 걸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뚫려 있는 위층으로 훌쩍 뛰어올라 손님 자리에 가볍게 착지하고는 곧장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예술 공연쯤으로 착각한 취객들의 박수갈채를 뒤로 한 채 쿠가네의 밤거리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쿠가네 대교. 다리 건너편은 이방인의 출입이 규제되어 있는 시슈 지역이니 여기로 도망쳤을 거란 생각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데, 술 기운이나 좀 깨볼까 싶어 밤의 대교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좀 전의 그 두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쪽은 이 허가증이 없으면 못 들어갈 텐데용?” 타타루가 도장이 찍힌 문서를 들고 팔랑팔랑 흔들면서 걸어온다. 괜히 인맥 넓기로 유명한 ‘새벽’의 금고지기가 아니군. 정식 입국허가증까지 손에 넣은 모양이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여기로 도망친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지? “쳇…….” 즉각 뒤로 물러나 해협을 왕복하는 선박의 돛대로 뛰어올랐다. 귀찮은 일은 정말이지 딱 질색이다. 이렇게 된 거 오기로라도 도망쳐주지. 그가 다다른 곳은 항구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쿠가네 성의 지붕 위였다. 제아무리 ‘새벽’이라도 여기까지는 쫓아올 수 없겠지. 하지만 몇 분 뒤, 그는 다시 타타루와 쿠루루의 모습을 보게 된다. 초롱을 손에 든 적성조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성곽을 올라와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들,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뭔가 특수 장치라도 있는 건가?” 본고장 코우슈산 청주로 인한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성격 때문일까. 쫓기면 쫓길수록 더 오기가 생긴다. 서서히 다가오는 초롱 불빛과 멀어지기 위해 에스티니앙은 계단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여기서 아침까지만 버티면 출항할 수 있어.” 어느덧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그야말로 새벽녘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해가 뜨면 그가 은밀히 탄 운송선 “쿠로보로마루’는 쿠가네를 떠날 것이다. “도망쳐도 소용없어용……!”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에스티니앙 눈에 들어온 건 역시 그 두 사람이었다. 이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갑자기 타타루 옆에 있는 여성이 머리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괘, 괜찮으세용? 쿠루루 님!” 당황한 타타루가 털썩 무릎을 꿇은 쿠루루를 부른다. 밤새 술래잡기를 한 탓에 피로가 쌓인 것인가, 그럼 내게 원인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천하의 에스티니앙도 도망치는 걸 잊고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을 뻔한 그때, 또다시 쿠루루가 겨우 억누르고 있던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봤어……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 당신…… 상당히…… 풉……” 이쪽을 보려던 쿠루루가 시선을 살짝 피하더니 배를 움켜쥐고 어깨까지 떨며 웃는 게 아닌가. “쿠루루 님, 에스티니앙 님의 과거를 보신 건가용?” 등골이 서늘해진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인가. ‘초월하는 힘’이라 불리는 요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곧잘 대면한 인물의 과거를 본다고 한다. 나 또한 그 영웅, 그리고 이젤과 여행하면서 몇 번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무엇을 봤단 말인가. 저 반응은 설마―― 짐작 가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남이 봐서는 곤란한 과거를 보인 것만은 확실하다. “후우…… 내가 뭘 봤고 뭘 안 봤는지, 일단 지금은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 우리 얘기를 좀 들어주지 않겠어?” 에스티니앙은 조용히 어깨를 으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쿠루루의 침묵을 조건으로 ‘새벽’의 일을 맡게 되었다. 영웅과 알피노가 그 존재를 확인한 갈레말 제국의 비밀 병기 ‘검은 장미’에 대해 조사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파기하라는 임무다. 물론 그 병기를 방치한다면, 제국군과 대치 중인 아이메리크와 조국의 기사들에게도 위험이 미칠 것이다. 그러니 창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별 재주도 없는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몇 시간 뒤, 그는 근동의 섬나라 라자한으로 향하는 무역선의 갑판에 서 있었다. 허리춤에 매단 가죽 자루에는 타타루가 동방 전설에 얽힌 모험을 하면서 손에 넣게 됐다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다. 활동 경비라고 한다. “이것 참, 이래저래 귀찮은 여행이 될 것 같군.” 에스티니앙은 온 카이가 선물로 건네준 오징어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역시 용이 구워준 오징어포는 별미다. 한편 그 무렵 쿠가네의 ‘시오카제 정’에서는 어린 용과 두 명의 라라펠이 식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과거를 보신 거예용?” 청주 때문인지 살짝 볼이 붉어진 타타루가 묻는다. 그러자 쿠루루가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그의 과거를 봤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이른 아침의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술집 안에 한바탕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8재해 서사록
나는 기록한다. 인간이 ‘제8재해’라 부른 이 시간을, 기록한다. 시드 갈론드의 증언을 요약하자면 그가 접한 사태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갈레말 제국의 식민지였던 도마와 알라미고가 당대 총독을 쓰러뜨리고 다시 독립을 이루었다. 그것을 계기로 다른 식민지에서도 해방운동이 활발해졌고, 그들을 지지하는 에오르제아 동맹 및 동방 연합과 갈레말 제국은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제국군이 알라미고와의 국경지대인 김리트로 진군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군도 집결했다. 평화협상의 자리가 마련되지만 결렬로 끝나 결국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만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제국군이 우세를 보였으나 전투가 장기화되자 동맹군의 반격 공세에 힘이 실렸다. 훗날 시드는 이를 두고, 대부분의 병사를 식민지에서 징집하고 있던 제국군과는 달리 조국을 위해 참전한 동맹군의 ‘의지’에서 차이가 났었다고 회상했지만 그 작용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따라서 다른 명확한 요인을 든다면 ‘새벽의 혈맹’이 동맹군에 가세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이 오면서 전략과 전술이 향상되었고 승리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전투 기록을 보면 분석 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날. 시드와 갈론드 아이언윅스의 핵심 인물들은 동주 오사드 소대륙의 일각, 영구 초토지대라 불리는 장소에 모여 있었다. 앞으로 있을 제국군의 침공에 대비해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청룡벽이라는 이름의 방어 필드를 강화해 달라는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 끝에 데리고 돌아온 네로 스카이와도 때 맞춰 합세해 현지에서 한창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그때,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에 받은 보고는 간결한 내용이었다고 시드는 말한다. “에오르제아 쪽 전장에서 터무니없는 병기가 사용됐다고 하는군. 랄거의 손길에 있는 지사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 ――보고 받은 내용대로다. 모순된 점은 없었다. 그 시점에 이미 모두 사망한 상태였으니 당연하다. 전장에서 사용된 건 ‘검은 장미’라 불리는 제국에서 만든 병기였다. 생명체가 갖고 있는 에테르의 순환을 강제로 정지시켜 몇 번의 호흡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기. 파급 범위는 실로 광대했는데, 특히 투하지점과 가까웠던 알라미고 지역은 생존자가 있는 마을이 더 적을 정도였다. 근방의 검은장막 숲과 다날란은 물론, 제국 영토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이것들은 모두――나의 몸체에는 아이센서와 녹음 마이크 이외의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기에―― 훗날 수집하고 저장한 사실들이다. 그 시각에 난 오고모로 산 중턱에 머무르고 있어 무기가 사용되었던 현장에는 없었다. 다만 내 옆에서 나와 함께 걷고 있던 노란 깃털로 뒤덮인 동행자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들었던 일은 기록한 바 있다. 나는 기록한다. 인간이 ‘제8재해’라 부른 이 시간을, 기록한다. 언어 발화 기능이 없어 장난감으로만 인식되고 있었을 내게, 다시 만난 시드와 동료들은 이상하리만큼 자주 말을 걸어 왔다. 이후 그들의 발언이, 기록이 내게 축적되고 있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각 데이터 항목을 참조할 것을 권장하지만 개요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검은 장미가 초래한 것은 다수의 사망자뿐만이 아니었다. 환경의 변화다. 정체의 힘을 띠는 그 병기로 인해 수많은 지맥이 흐름을 멈췄다. 에테르 공급이 끊긴 토지는 황폐해져 인간이 살기 어려운 장소로 변모했다. 이윽고 주변 지역에서도 에테르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때로는 그 불균형이 생물의 성질도 변화시켰다. 그동안 주식으로 먹어 왔던 농작물이 하루아침에 독성을 띠게 된 사례도 있었다. 그로 인해 사망자의 숫자는 더 늘어났다. 재해 이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 영위하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인간이 가진 사회성이라는 힘을 증폭시켰던 ‘국가’라는 조직 형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변화는 에오르제아뿐 아니라 갈레말 제국 영토까지 점차 확대되었다. 그들의 생활과 군사력을 뒷받침하고 있던 마도 기술은 청린수가 격하게 연소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기반이 된다. 그러나 검은 장미에 물들어 버린 세계에서, 청린수는 그 특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고 제대로 가동시킬 수 없어진 기존의 청린기관은 그저 쇳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음과 변화에 직면한 생물들은 무엇을 시작했는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적극적으로 전투를 했다. 거주할 수 있는 땅을 둘러싸고.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둘러싸고. 더 이상 규제 당하지 않는 욕심으로 인해. 복수라는 명목 하에. 가장 많은 동족을 죽인 것도 인간이었다. 시드와 동료들은 이 상황을 놓고 ‘진흙탕’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실제로 진흙으로 뒤덮인 땅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진흙이라 불리는 물질은 그 점성과 깊이, 시야의 불투명함 때문에 해결하기 힘든 사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쓰인다. 기록 데이터 열람 시 착오가 없게 해두고 싶다. 그렇게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인간은 문화와 사회성이라는 특유의 힘을 잃고 좀 더 원시적인 짐승의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나는 인식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개체는 남아 있었다.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생존자들도 그 예이다. 그들은 점차 확대되어 가는 전투의 불씨를 막기 위해, 착취 당하는 자를 보호하고 착취하는 자를 억제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해 때로는 뜻을 함께 하려는 자들도 나왔지만―― 그보다 더 자주 동료들을 잃었다. 어떤 라라펠족 기술자는 난민 마을에 우물을 만들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노상강도에게 습격을 당해 치명상을 입었다. 동료들이 아무리 손을 써도 쇠약해져만 갔다. 그와 늘 행동을 함께 하던 덩치 큰 기술자는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격려의 말을 건네며 손을 잡자, 간신히 의식이 돌아온 그는 동료를 보고 반드시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손을 남겨 그 생명을 이어가 달라고도. 그 말을 들은 자는 “너야말로”라고 손을 잡은 채 대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직, 타타루 씨뿐임다.” 나의 동행자도 그에게 볼을 갖다 대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마를 무렵. 시드와 동료들은 한층 더 여윈 얼굴로 거점에 있는 한 회의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논의를 계속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편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몇 가지 효과적인 선택지를 미래에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신들을 비롯해 동시대에 살고 있는 동료들을 저버리는 행동이 되진 않을지 우려하는 의견도 나왔다.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무의미해지진 않지.” 이로써 그들의 행동 지침이 결정되었다. 나는 기록한다. 인간이 ‘제8재해’라 부른 이 시간을, 지금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갈론드 아이언웍스가 추구했던 것은 검은 장미의 효과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제8재해가 되어 버린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회피하는 방법―― 즉 과거를 바꾸어 ‘재해가 일어나지 않은’ 역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이 확립 가능한 이론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찬성하기 힘든 행동이었다는 건 나라도 이해할 수 있다. 짐승이 중요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그리고 예상 가능한 아주 가까운 미래의 안정이다. 시드와 동료들의 행동은 그들에게는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실제로 반대하는 자가 나타났다. 협력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다 필요 없고 물자를 내놔’라며 공격해오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도 분명, 존재했다. 제8재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마법과 에테르학에 정통한 식자들이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재해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영웅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럼 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처럼 세계가 비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주변 식자들은――아무래도 다들 그 인물과 면식이 있는 듯했다―― 찬동의 뜻을 드러냈다. 그 가설에 어떤 상승 작용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그들의 지적 향상심 덕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이었는지 판단은 불가능하지만, 훗날 그들은 재해의 구조와 제8재해의 진실을 규명해냈다. 또한 ‘제8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역사를 성립시키자’는 목적이 ‘그 영웅이 죽지 않게 하자’는 말로 바뀌자 더 많은 찬동자가 나타났다. 물자 부족이 만성적인 문제가 되고 있을 무렵, 식량을 가져다 준 자가 있었다. 자신이 도와줄 일은 없느냐며 찾아온 장인도 있었다. 그들 또한 그 영웅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나마즈오라 불리는 종족의 협력자는 역사를 바꾸는 것에 깊은 이해를 드러냈다. “큰메기님은 이런 미래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담메. 그러니까 자기가 본 건 제8재해가 일어나지 않은 역사의 미래였다고, 광풍원 세이게츠가 말했었담메!” ――이 발언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일단 그대로 기록해 두기로 한다. 시간이 흘러도 협력자는 나타났다. 어떤 날엔 연구 기자재를 옮기던 중에 도적을 만난 동료를, 거대한 비공정이 나타나 구해주었다. 그 비공정을 조종하는, 자칭 ‘하늘도적’이라는 여성은 금발을 쓸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과거에 그 영웅님이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했어. 명색이 2대 하늘의 여왕인데, 내가 그 빚을 갚아줘야 하지 않겠어?” 조사와 실험을 위해 벽지로 파견 나갔던 자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보고를 했다. 홍해를 이동하던 그는 선상에서 습격을 당해 바다를 표류하다 근방의 섬으로 흘러 들어 갔는데, 몽롱한 의식 속에서 커다란 동물 같은 것―― 거북 또는 뱀으로 보였다고 한다――이 자신을 돌봐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마찬가지로 솜 알을 오르던 중에 사고를 당한 자가 흰 날개를 가진 거대한 존재의 도움을 받은 일도 있었다. 틀림없이 드래곤족이었을 거라고 당사자는 말했지만, 그들은 인간이 일으키는 전란이 싫어서 그 지역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이 사례들과 그 영웅을 직접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그자의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관련을 지으며 사기충천하는 자도 있는 듯했다. ――그 모든 일을 거쳐 지금. 노령이 된 시드의 주름투성이 손이 그들이 추구한 이론의 마지막 한 줄을 기록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나서 옆에 서 있는 네로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시드만큼 나이가 든 네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그에게서 늘 관측되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을 해 보였다. “……뭐, 나쁘지 않군?” 긍정치고는 모호하다. 하지만 시드는 눈을 감고 다시 깊은 숨을 내쉬면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뒤쪽에 있던 주전자를 움직여 금속 머그컵 두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 한 잔을 네로에게 건네고는 가볍게 위로 들어올렸다――건배라고 하는 동작이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홀짝였는데, 오늘 네로가 ‘맛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겠다. 조금 뒤 시드가 자신들이 기록해 온 종이 뭉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실현……될 거라고 보나?” “글쎄. 이론은 확실해도 막상 시도해보니 완전히 다르더라는 이야기는 흔히 있잖아. 그런 경우까지 포함해서 이제…… 젊은 녀석들 손에 달린 셈이야.” “그래.” 이후 말이 없다. 그 침묵 속에 존재하는, 인간만이 관측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나는 기록할 수 없다. 다만 시드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 인간이 할 법한 대답은 도출해낼 수 있다. 마치 ‘그때’처럼……. 그들이 만들어낸 이론의 핵심은 크리스탈 타워, 기공성, 그리고 차원의 틈과 관련된 모험에서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모험의 결말은 단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잘 자라. 그리고 나는 인간이 그 다음에 나누는 말을 알고 있다. 조용히 잠이 들었다가, 이윽고 해가 떴을 때 하는 말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아무리 먼 미래라 해도 그곳에 이르기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알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
아주 멀고 먼 옛날. 아직 기도를 올릴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 신이었을 무렵. 하나의 별에는 단 하나의 세계만이 있었고, 그것과 겹쳐지듯이 ‘생명’이 떠도는 영역이 있었다. 에테르계라 불리는 그 영역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들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영역, 죽은 자가 돌아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명계’라고도 불렸다. 명계는 신, 즉 인간들에게 아주 가까운 존재였다. 물이 땅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바다에서 구름이 생기고 그것이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가듯이 생명의 순환을 담당하는 장소 중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권 내에 있었냐고 묻는다면 모두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들조차 지혜를 쓰지 않으면 명계를 들여다볼 수 없었고, 거기서 힘의 일부를 끄집어낼 수는 있어도 모든 흐름을 제어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인간 중에 아주 드물게, 명계의 사랑을 받은 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날도 수도 아모로트에는 평화로운 밤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부드러운 불빛이 켜지고, 로브를 입은 시민들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큰길을 오가고 있다. 너무 어둡지 않아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또한 너무 밝지 않아 잠자리에 들기도 좋은 이 도시의 밤을,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보내고 있으리라. 그날 밤, 마을 한 모퉁이에 지어진 공원의 구석에서 한 남자가 잔디에 누워 있었다.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지만, 얼굴의 절반은 이 세상 단 하나뿐인 형태의 붉은 가면으로 덮여 있다.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는지 거의 다 벗겨진 후드에서 흰 머리칼이 보인다. 가면 그림자에 가려진 두 눈은 그저 멍하니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언뜻 별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만물이 가진 에테르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땅에도 흐르고 하늘에도 올라, 별을 구석구석까지 밝히고 있다. 어딘가에서 제 역할을 끝낸 생명이, 바람을 타고 떠돌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건너편―― 명계로 떨어진다. 의식만 집중하면, 한없이 깊은 곳, 한없이 먼 곳 까지도, 순환하는 생명을 포착할 수 있다. 물질이 갖고 있는 에테르를 볼 수 있는 자는 적지 않지만, 그가 가진 능력만큼 선명하게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것이다.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혼이 저마다 다양한 색을 띠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의 눈에는 보였다. 그야말로 명계의 주민이라 비유될 만한 능력이었다. 남자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누군가 잔디를 밟으며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걸 알면서도――귀찮은 일을 내던져 버리듯 눈을 감는다. 하지만 발소리의 주인은 그의 머리 바로 위까지 오더니, 선 채로 내려다보며 거침없이 말을 걸어 왔다. “여어, 14인 위원회로 취임한 걸 축하해, 하데스. 아니지, 이제는 에메트셀크라 불러야 하나?” 말을 들은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말을 한 남자는, 가면으로 덮여 있지 않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발치에 있는 붉은 가면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자, 내가 졌다는 듯이,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남자는, 완전히 드러난 흰 머리칼을 칠흑색 후드 안에 다시 넣은 후에야, 지극히 불쾌한 듯한 목소리로 찾아온 자에게 대답한다. “……축하고 뭐고 필요성이 있으니까 받아들인 것뿐이야. 이게 다 네가 위원회 가입을 거절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휘틀로다이우스.” “아니지, 그런 게 바로 적재적소라는 거야. 보이는 걸 잘 활용할 수 있는 너와는 달리 나는 보고 즐기기만 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창조물 관리국 국장 자리에 있는 것도 좀 아니라고 보는데. 민중 토론관에서 적임자인지 아닌지 한번 토론해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대꾸하며 가면 아래서 흘끗 노려보지만, 창조물 관리국 국장 휘틀로다이우스는 신경도 안 쓰고 계속해서 밝은 미소를 띠며 웃고 있었다. 검은 로브에 흰색 가면, 별다른 특징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그 또한, 명계를 내다보는 눈을 가진 에메트셀크와 같은 부류였다. 아니, 보는 것만 따지자면 그가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 그 두 눈동자는 늘 본질과 진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렇기에,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데아’를 취급하는 창조물 관리국의 업무에 그가 적임자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느슨해서야, 라고 늘 생각하고 만다. 에메트셀크는 계속 웃고 있는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무슨 일이야”라고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얼굴에 한층 더 웃음이 번졌기에, 에메트셀크는 조금…… 아니 많이,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취임한 거, 그 사람에게는 이미 보고한 거야?” “……뭐? 왜 굳이 그래야 하지? 당연히 누군가가 보고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14인 위원회의 인사잖아? 금세 모두 알게 될 거라고.” “그래도 직접 보고하는 게 낫지, 새로운 에메트셀크. 어디 있는지 내가 찾아’봐’ 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됐으니까 넌 오늘 일이나 빨리 끝내.” 에메트셀크가 위압적으로 말하자, 휘틀로다이우스는 처음으로 웃음기를 거두더니 일을 못 끝낸 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무언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또다시 긁어 부스럼이 될 게 뻔했지만…… 진득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를 또 이기지 못하고, 에메트셀크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라하브레아 학술원에서 왔었잖아. 그렇다는 건 심사 의뢰 대상도 거물급이었을 테니 이 시간에 네 일이 끝나 있을 가능성은 낮겠지. 그런데도 굳이 날 찾으러 온 걸 보니 상담인지 부탁인지는 몰라도 또 귀찮은 일을 들고 온 거 아냐?” 휘틀로다이우스는 그의 대답을 음미하듯이 잠시 침묵하더니――이내 어깨가 흔들리도록 웃기 시작한다. “아니, 취임이 결정됐는데도 이런 곳에 누워 있는 친구를 발견한 김에 축하한다는 인사라도 할까 싶어 온 것뿐인데…… 후후……. 그래, 넌 원래 어떤 행동이든 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하지. 응, 그렇지…… 후후후……” 에메트셀크는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딱히 용건이 없다면 가겠다며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당황한 휘틀로다이우스가 그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사실 곤란한 안건이 없는 건 아냐. 괜찮다면 힘을 빌려줘, 위대한 에메트셀크.” “불사조의 이데아 라고?” 창조물 관리국의 특별층. 평소에는 출입금지인 그 층의 복도를,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휘틀로다이우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 질문에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엄밀하게는 생물이 아니라 새의 형태를 한 마법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거야. 뛰어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행사할 수 있어. 라하브레아 학술원이 혼신의 힘을 쏟은 신작답게 “어떤 시점에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창조물이야.”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말했듯이 그 불사조는 생물로 창조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형태를 가진 마법으로서 고안된 건데…… 아무튼 봐봐.” 휘틀로다이우스는 그렇게 말하고 막다른 곳에 있는 거대한 문에 손을 갖다 댄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자――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귀가 찢어질 듯한 새의 울음소리에 에메트셀크는 가면 밑의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주저 없이 문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홀을 날아다니는, 불꽃 색을 띠는 아름다운 새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에메트셀크가 시선을 떼지 못한 건, 그 날개가 화려했기 때문은 아니다. 새의 내면에…… 그저 마법일 뿐인 그 안에, 있을 리가 없는 빛을 봤기 때문이다. “혼이 깃들어 있잖아……?” ――인간은 창조마법으로 삼라만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창조할 수 없는 것이 ‘혼’이었다. 그것은 생물이 물질계의 이치에 따라, 즉 생물로서 모순되지 않은 형태로 만들어질 때, 그 내면에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별이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인간이라 해도 단독으로 창조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생물로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껍데기가 그것과 흡사한 형태라 하더라도 혼을 얻을 수는 없다. 일종의 현상 또는 마법 생물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새를 올려다 본 채 말한다. “사고가 좀 있었어. 불사조의 이데아를 심사하고 있는 도중에 주변을 떠돌던 혼이 들어가 버린 거야. 저 상태를 보아하니 아마 미련이 남아서 방황하고 있던 혼이었나 봐. 명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을 치고 있어…….” 에메트셀크도, 울부짖으며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본다. 새는 회관의 두꺼운 벽에 부딪치고는 무참하게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치유가 시작되는 탓에, 체력이 떨어지기는커녕 몸을 다시 벽에 부딪치면서, 넘치는 마력을 불꽃으로 바꾸어 마구 뿜어댄다. “……가엽군.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가. 저렇게까지 된 이상, 이젠 남은 제 목숨에 휘둘리기만 하겠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이 초조하고 슬퍼서 방황하고 상처 입고…… 상처를 입히고.” “오, 넌 이해한 거야? 나하고는 아무래도 인연이 없는 감각이라서.” “이해하긴 뭘 이해해. 그냥 짐작이야. ……그래서 어쩔 셈이지? 라하브레아 학술원의 걸작이라 해도 이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텐데.” 그러자 휘틀로다이우스가 에메트셀크를 뒤돌아봤다. 그 입가의 웃음을 본 에메트셀크는 자신이 또 괜한 걸 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돌려보내고 싶어도, 불사조잖아.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고통만 주게 될 거야. 그래서 내일 특별히 실력 좋은 마도사를 부를까…… 싶었는데, 네가 해준다면 그래, 더할 나위 없겠는걸.” “……” 에메트셀크는 입을 다물고 어깨를 늘어뜨린다. 원망하듯 옆에 있는 친구를 노려보지만 그의 입가는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다. 이제 와서 반론은 더 귀찮으니 차라리 이걸로 빚을 빌려준 셈 치자고 결심한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자―― 갑작스레 에메트셀크의 윤곽이 흔들렸다. 저녁 노을에 길게 늘어나는 그림자처럼, 그 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야, 오늘도 압권이네.” 그렇게 말하는 휘틀로다이우스의 눈에는, 명계로부터 친구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렬한 힘의 흐름이 보였다. 그야말로 명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딱 맞을 것이다. 마도사는 수없이 많지만 이렇게까지 강대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자는 14인 위원회 중에서도 있을까 말까 하다. 휘틀로다이우스는 변화를 마친 친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역시 네가 에메트셀크가 된 건 정답이었어. 다시 한번 취임을 축하해.” 에메트셀크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인 것도 같고, 살짝 웃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다시금 한번 불사조를 향하더니―― “……폐하, 폐하.” 조바심 가득한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에테르가 흐르는 쪽으로 시선이 따라간다. ――그곳에 과거와 같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짝거림은 없다. 물로 희석된 것 같은 흐릿한 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괜한 걸 봤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다. 이 상황…… 아무래도, 의자에 앉은 채로 살짝 졸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이제 알현에 응하실 시간입니다.” 겨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긴 금발 머리를 묶은 키 큰 청년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있다. 미간의 깊은 주름 때문에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채 20살이 되지 않은 자신의――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솔 조스 갈부스의 손자, 바리스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며칠 전에 있었던 폭동 진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사실 개별적으로, 게다가 사적인 공간까지 찾아와서 보고를 할 만큼 큰 사건도 아니었을 터다. 그럼에도 바리스가 찾아온 건, 나름대로 무공을 자랑하려는 기개를 보인 것인가, 아니면 배후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선동을 당해서인가…… 유심히 생각해본다. 어느 쪽이든, 하찮기 그지없는, 불완전한 것들의 어리석은 행위다. 솔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걷기 시작한다. 바리스 옆을 지나치자 그가 문득 말을 건다. “……저의 무엇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십니까.” 멈추고 살짝 뒤돌아보니, 손자는 드물게도 그 나이에 걸맞는…… 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부의 그간의 태도에, 그도 불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다. 솔은 잠시 생각하다, 금세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그 덩치다.” “……네?” 당황한 바리스가 무심결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생각이 없는 솔은 이번에야말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방을 나왔다. 알현실을 향해 복도를 걷다 보니 무의식 중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갈레안족은 혈통에 따라 상당히 체격차이가 있지만, 솔의 육체는 유별나게 몸집이 큰 편은 아니다. 부인이었던 여자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은, 갈레안족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크고 강인한 체격이었다. 주변에서는 극구 칭송했지만 솔만은 내심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어차피 결국은 불완전한 존재. 진정한 동포들을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 짧은 생에 집착하고 그것을 위해서 계속해서 과오를 저지르는 어리석은 파편……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을 때 자신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말았는가―― 결국, 그가 무언가를 “바라고” 말았던 장남은, 시답잖은 병에 걸려 명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그 혈통을 이어 체구까지 꼭 닮은 자가 눈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당시의 작은 실수를 끊임없이 기억나게 한다. 아아 정말이지――진절머리가 난다. 남자는 문 앞에서 서서 순간, 눈을 감는다. 귀찮은 일을 모두 내던져 버리듯.
영광의 낙양
이것은 아직 노르브란트의 하늘이 정체된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전의 일. 높이 달린 창문에서 비추는 달빛을 받으며 열심히 실험용 유리병을 들여다보는 자가 있었다. 이곳 푀부트 왕국의 주요 민족인 드란족도, 갈젠트족도 아니다. 응 모우족 젊은이 베크 러그다. ‘혼’의 신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그에게 왕가에서는 그뤼네스리히트 성 한구석에 따로 방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그곳에 틀어박혀 분초를 아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이 날 역시 새벽을 향하고 있는 시간임에도 실험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곳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푀부트 왕국의 제2왕녀 폴디아다. 호기심 왕성하고 붙임성 좋은 이 드란족 소녀는 휘황찬란한 왕성에 있으면서 은둔자처럼 살고 있는 베크 러그가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수시로 찾아와서는 주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베크 러그가 돌아보니 드물게 어두운 표정이다. “피아, 혹시 무슨 우울한 일이라도 있어?” 베크 러그는 친밀하게 애칭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 언니인 솔디아 공주가 세 가지 국보를 물려받은 것 때문이구나? 제2왕녀인 넌 그게 썩 달갑지 않은 것이고.” 푀부트 왕국에서는 쌍두 이리를 본뜬 세 개의 장신구를 국보로 지정하고 그것을 대대로 왕위 계승자에게 물려준다. 바로 며칠 전 제1왕녀인 솔디아가 그것을 물려받았고, 이것은 사실상 후계자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 세계의 사정에 어두운 베크 러그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야! 항상 공명정대하고 당당한 언니가 왕위를 물려받는 게 당연해! 내 소원은 언니를 곁에서 계속 보좌하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아버지가 혼담을……!”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폴디아를 보고 베크 러그는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했다. 인간들은 왕위를 욕심 내는 법이라고, 동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예외인가 보다. 자, 그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베크 러그가 생각에 잠겨 있자니 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마른 체격의 드란족, 궁정 마도사 타드리크다.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과장된 동작을 섞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폴디아 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솔디아 공주님께 왕위를 물려준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제2왕녀인 당신을 타국으로 시집보내 왕가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자에 놀라면서도 폴디아는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국가의 안녕을 가장 생각하신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요, 그럼요, 폴디아 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말고요. 원치 않는 혼인이 행복할 리 없다는 것을 아버님도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타드리크가 왕가의 상담사로서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을 얻은 폴디아는 본래의 밝은 성격으로 돌아왔다. “어머, 정말? 고마워, 타드리크…… 정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어! 그에 비해 베크 러그는…… 위로의 말 한 마디도 안 하더라니까?”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를 향해 베크 러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며칠 뒤. 베크 러그의 연구실에 찾아온 폴디아는 그 뒤로 혼담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타드리크의 설득 덕분에 롤드리크 왕은 그녀의 혼담을 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그녀가 궁정에 머물기 위해서는 제2왕녀라는 신분을 버리고 궁정 마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 마법에 재능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 전에 말한 적 있었잖아. 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재능을 깨우는 비술을 발견했다고……” 매달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이 베크 러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안 돼, 피아. 그건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어. 육체의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비약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마법의 재능에 눈뜨게 하려면 혼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이 미쳐.” 베크 러그는 위험성을 애절하게 설명했다. 혼은 섬세한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잠들어 있는 재능을 각성시키지도 못하고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탁할게. 베크 러그. 난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 궁정 마도사가 되지 못하면 사랑하는 언니를 보좌할 수도 없고,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단 말이야!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아, 절대로……!” 베크 러그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성 안에서 유일하게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다정한 마음씨에 보답할 길이 있다면 그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 아닐까? 고뇌 끝에 그는 탐탁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폴디아는 마술 시련을 통과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궁정 마도사가 되었다. 신분은 달라졌지만 폴디아는 그 후로도 연구실에 자주 찾아와 끝도 없는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위험한 비술을 가르치고 말았다는 후회는 조금씩 옅어졌다. “그나저나 손거울 호수에 미지의 마물이 나타났다면서? 피아도 조심하도록 해.” 당대 롤드리크 왕이 왕좌에 앉은 뒤로 수십 년 동안 푀부트 왕국은 큰 전란에 휘말리는 일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어디선가 침입한 마물이 양치기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국 기사의 활약으로 마물은 격퇴했지만 주민들의 동요가 가라앉기도 전에 계속해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조사를 해보니 마물은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던 주민이 마물로 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주민들은 내일이면 이웃집 사람이 마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서로를 의심하며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롤드리크 왕은 궁정 마도사들에게도 왕국 기사단과 함께 수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두 조직을 통솔하는 자가 없다 보니 오히려 현장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사태를 호전시킨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제1왕녀 솔디아였다. “언니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갈젠트족 왕국 기사들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앞장서서 싸운다고!” 폴디아가 흥분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차기 국왕으로 인정받은 솔디아가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하면서, 평소 대립 관계에 있던 왕국 기사들과 궁정 마도사들이 결속했고 그 결과 마물과의 전투도 유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원인규명은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경계 태세는 강화되었고, 주민이 마물로 변이해도 신속한 대응을 통해 피해 확대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크 러그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이 마물로 변하는 현상에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폴디아에게 가르쳤던 비술. 그것을 응용하면 이론상으로는 혼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개조해 인간을 마물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피아가 비술을 악용했을 리가 없다. 베크 러그는 의심을 거두듯이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 수사를 지휘하던 솔디아가 마물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그 책임을 물어 호위 역할을 하던 왕국 기사가 추방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베크 러그는 귀를 막고 연구실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 범인이 누구든 언젠가 누군가는 밝혀내 처벌할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 세상은 그렇게 균형을 맞춰가고 있을 거라 믿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날도 베크 러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실험용 유리병을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왕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응 모우족 슬 오울이다. “큰일이야, 베크 러그! 마물화 사건의 흑막이 판명되었어!”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두려워하던 날이기도 했다. 최대한 냉정한 모습을 가장하며 베크 러그는 누구냐고 물었다. “궁정 마도사 타드리크야! 모험가들이 그자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을 밝혀냈어!” 폴디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사실에 베크 러그는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난 지금부터 모험가들과 함께 타드리크를 쫓을 거야! 이미 성 내부는 마물 천지야! 이 방에서 절대로 나오면 안 돼!” 방을 뛰어나가는 슬 오울의 등에 대고 베크 러그가 물었다. “피아는…… 폴디아는 어디 있지?” “아직 자기 방에 있을 테지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모험가 중 한 명에게 보호를 부탁해 놨거든!” 떠나는 동족을 바라보며 베크 러그는 친구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며칠 전 사건을 수사하러 온 모험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정보 수집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그들만 믿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연구실을 뒤로했다. 하지만 싸움에 능하지 않아, 마물이 보이면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결국 마물에게 들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을 때, 어떤 자가 앞에 끼어들었다. “비켜라! 강아지!” 야수와 같은 마물을 단칼에 베어버린 건 엘프족 검사였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꽉 묶은 그녀는 볼품없이 쓰러진 베크 러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흘깃 쳐다보더니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뛰어서 사라졌다. 저자는 아르버트의 동료―― 그렇다면 슬 오울이 보호를 부탁했다는 모험가가 저 여인인가. 강아지로 불렸다는 분노조차 잊고 필사적으로 뒤를 쫓으니 그녀는 폴디아의 방문을 발로 차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무례하다!” 분개한 베크 러그는 엘프족 검사를 밀어젖히고 열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베크 러그의 등 뒤로 검을 든 검사가 다가섰다. “쳇…… 늦었군…… 마지막 자비다, 한번에……” 마물의 피로 더럽혀진 검의 날이 폴디아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베크 러그는 정신을 차렸다. “멈춰라, 제발 멈춰줘!” “어리석은 소리 마라…… 이 녀석의 왼쪽 팔을 봐, 변이가 시작되고 있다고!” 그 사실은 베크 러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친구를 죽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부탁이다, 난 혼 연구가야! 그녀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니 적어도 목숨만은……!” 변이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매달리는 베크 러그를 보며 엘프족 검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사람을 공격하기 전에 어딘가에 유폐할 수밖에 없어. 여긴 성이니까 지하 감옥 정도는 있겠지?” 결국 검사는 투덜거리면서도 폴디아를 기절시키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역할이 끝나자마자 흑막 타드리크를 잡으러 간 동료들에게 달려갔지만―― 베크 러그는 어스름한 독방에서 친구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눈을 뜬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긴 했지만, 마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타드리크 이놈, 날 배신하다니……! 언니를 죽이고 나면 날 여왕으로 추대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 때문에 베크 러그를 구슬려서 비술을 손에 넣었건만……!” 눈앞에 있는 베크 러그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폴디아는 일심불란하게 자신의 피를 이용해 벽에 뭔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언니만, 언니만 없었더라면……! 난 언제까지나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었어……! 솔디아만 없었더라면!!!!” 잠시 멍하니 있던 베크 러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가족 중에 솔디아 공주는 없는 거야? 피아! 넌 누구보다도 언니를 사랑하고 존경했잖아……!” 그러자 폴디아는 빙글 뒤로 돌더니 눈을 크게 떴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그래…… 난 가족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이상하네, 왜 잊고 있었지……” 힘없이 주저앉은 폴디아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타드리크의 저주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묶여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베크 러그…… 내 친구…… 마지막으로…… 꼭…… 사과하고 싶었어…………”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 한 방울이 차가운 돌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폴디아의 육체는 완전히 마물로 변했다. 그날 이후로 베크 러그는 자취를 감췄다. 일련의 사건으로 차기 국왕을 잃은 푀부트 왕국은 빛의 범람 후 죄식자 무리의 습격에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국가를 포기한다. 그뤼네스리히트 성이 버려진 뒤, 한 왕국 기사가 과거의 제2왕녀를 애처롭게 여겨 독방을 열어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지만, 그 뒤로 폴디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볼레크도르프의 낮잠
옛 성질이 발현된 격세 유전 아마로는 일반 종의 수명을 크게 뛰어넘는다.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노화도 오기 마련. 눈은 침침하고 날개에는 기력이 없다. 볼레크도르프의 총명한 아마로들을 통솔하는 세토 역시 진작에 백 살은 넘긴 몸이라 최근에는 특히나 조는 시간이 늘었다. 오늘도 달콤한 꽃향기가 이끄는 대로 낮잠에 빠져 그리운 꿈을 꾼다. 이곳은 아므 아랭의 도시, 나바스아렝.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마을의 한 모퉁이에 앙상하게 마른 어린 아마로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한창 성장기일 텐데 물과 먹이를 충분히 먹지 못하고 혹사를 당하면 이렇게도 되리라. 뜨거운 돌바닥에 눕고 싶은 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목줄이 짐수레에 고정되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채찍을 사랑하는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이라도 쉬어 두는 게 좋겠다는 것이 이 아마로의 생각이다. 아, 주인님께서 오신다. 거리에 있는 석조 건물의 상점에서 뚱뚱한 흄족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손에는 남자가 애용하는 채찍이 들려 있다. 도마뱀의 힘줄로 만들어진 저 채찍을 맞으면 정말이지 너무 아프다. 그러니 아무리 피곤해도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온다, 온다, 채찍이 온다. 목일까, 어깨일까, 등일까 아니면 엉덩이일까. 얼굴은 안 때리면 좋겠다. 어린 아마로가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 같았으면 제일 먼저 날아왔을 채찍이 잠잠하다. 눈을 떠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소년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린 남자가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쇠도끼를 짊어지고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삐쩍 마른 아마로와 뚱뚱한 남자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찾았다, 라문스 씨! 아니, 비취 여우라고 불러야 하나?” 이것이 훗날 ‘세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아마로와 모험가 아르버트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동료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수개월 전, 나바스아렝의 시장에서 가짜 보석이 발견되었다. 숙련된 감정사의 눈도 속일 정도로 정교한 상품인 탓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신뢰와 명예가 훼손된 나바스아렝의 보석상 조합은 이 베일에 싸인 사기꾼을 ‘비취 여우’라고 부르며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그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전국 각지에서 현상금을 노리고 모여들었으나, 그들이 찾은 건 ‘여우’가 시장에 유통시킨 모조품뿐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2인조가 있었으니 바로 신출내기 모험가 아르버트와 라미트였다. 이들은 전직 왕국 기사이자 숙련된 모험가인 브란덴의 협력을 얻어 환영 마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모조품 제작의 비밀을 밝혀내고, 결국엔 라문스라는 남자를 잡았다. 세 사람은 획득한 상금을 똑같이 나눴다 ―― 하기야 술고래인 브란덴에게 큰돈을 쥐어주면 하룻밤 만에 술값으로 다 사라질 것이 뻔했다. 몇 차례에 걸쳐서 주겠다는 라미트의 제안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면서, 브란덴은 정식으로 이 일행에 합류하게 되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럼 생전 처음 손에 쥐게 된 큰돈을 아르버트는 어디에 사용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그 앙상하게 마른 아마로를 구입했다. 라문스의 소유물이었던 아마로가 나바스아렝 당국에 압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협상을 진행한 결과다. 아르버트가 데리고 온 삐쩍 마른 아마로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브란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봐, 애송이, 제정신이야? 그 삐쩍 마른 녀석을 어쩌자고 데려와. 긴 여행은 물론이고 성곽 둘레나 제대로 돌 수 있겠어? 그렇다고 구워 먹자니 뼈만 있어서 먹을 것도 없겠고.” 무시당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아마로는 불만스럽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버트는 아마로의 턱 밑을 쓰다듬으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저 아저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토. 누가 영리한 너를 잡아먹게 놔둔대? 우리 둘이서 브란덴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어째서 아르버트는 세토라고 이름 붙인 이 아마로에게 빠지게 되었을까. 물론 너무도 사람 좋은 그이기에, 가치가 없다며 살처분되기 직전이었던 세토를 불쌍히 여긴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콜루시아 근해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난 아르버트는 산촌이었던 고향에 비슷한 또래 친구가 없어 동물들을 친구 삼아 산을 뛰놀며 자랐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아버지는 그에게 온갖 동물들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고, 아마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세토가 틈날 때마다 주저앉았던 건 예전 주인의 가혹한 처사를 견디기 위해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지혜라는 사실을. “자, 해봐, 세토!” 아르버트가 손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내면 세토는 호박석 벌판의 거친 땅바닥에 몸을 힘없이 엎드린다. 그러면 아르버트는 브란덴과 라미트를 데리고 근처 바위터에 몸을 숨긴다. 행상인들을 위협하는 코요테 떼를 토벌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세토를 미끼로 써서 유인해내려는 그들의 작전이다. “먹을 것도 없는 저 삐쩍 마른 아마로를 미끼로 써서 잘될지 모르겠네…….” 큰 덩치를 한껏 웅크리며 브란덴은 못 미더운 듯 말을 내뱉었다. 정작 세토는 새로운 주인이 당황스러웠다. 전 주인과는 달리 아르버트는 결코 채찍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채찍은커녕 너무나도 다정하다. 먹이와 물도 듬뿍 주는 데다가 털 손질까지 직접 해주었다. 그가 턱 밑을 긁어주면 어쩐지 꿈을 꾸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있었다. 자신에게 여러 재주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기껏 받게 된 좋은 대우를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대에 부응했는데…… 세상에, 여기서 산 제물로 바쳐질 줄은 몰랐다. 아아, 역시. 인간은 믿으면 안 돼.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거친 들판에 누워 있으니 정말로 코요테 떼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동안 배불리 먹였던 건 다 이것 때문이었나, 이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토, 이제 됐어, 이쪽으로 와!” 도끼를 짊어진 아르버트가 바위 그늘에서 뛰쳐나와 맹렬하게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날 버리지는 않을 건가 보다. 세토는 벌떡 일어나 전력을 다해 주인을 향해 뛰었다. 학대를 받은 영향이 아직 남아 있는 세토는 하늘을 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뛰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브란덴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크게 웃었다. “하핫, 말라깽이가 엄청 당황했나 봐!” 또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걸 직감한 세토는 일부러 진로를 변경해 브란덴 쪽으로 돌진하더니 그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자 세토를 쫓고 있던 코요테 떼가 웃고 있는 거대한 남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으악, 저 바보 아마로!” 이번에는 브란덴이 당황할 차례였다. 이렇게 행상인 습격범 토벌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보상도 챙겼다. 이후로도 아르버트 일행은 계속해서 마물 토벌 의뢰를 성공시켰다. 세토는 때로는 병약한 미끼를, 때로는 영역을 어지럽히는 도전자를 연기하면서 표적을 유인했다. 호박석 벌판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거대 포루스라코스를 토벌할 때도 세토의 명연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놀랍게도 세토는 포루스라코스 암컷의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아르버트조차도 생각지 못한 재주를 보여주며 신출귀몰하기로 유명한 토벌 대상을 훌륭히 유인해냈다. 상처 입고 도망가는 포루스라코스를 쫓다 둥지에 도착하게 된 일행은 격렬한 전투를 펼친 끝에 그 대상을 토벌할 수 있었다. “둘 다 이것 좀 봐! 돈이 될 것 같지 않아?” 혹서의 황야에서도 절대로 투구를 벗지 않는 드워프족 라미트가 말했다. “우와, 대단한걸. 포루스라코스가 반짝거리는 걸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마른 풀로 만들어진 둥지에는 둥지 주인이 모아놓은 듯한 귀금속이 남아 있었다. 브란덴은 유독 크고 금색으로 빛나는 메달을 집어 들어 태양에 비췄다. “특히 이건…… 나바스아렝 왕가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에게 주는 훈장이야. 200년 이상은 됐을 거야. 묘지를 파헤쳤거나 습격했던 사람의 소지품이었나 본데…… 아무튼 고물상에 가져가면 상당히 값을 쳐 주겠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브란덴이 전리품으로 얻은 메달을 자신의 품속에 넣으려고 하자, 옆에서 아르버트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잠깐, 브란덴. 이 메달은 오늘의 공로자에게 줘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럼 더더욱 내가 가져 가야지. 그 놈의 강렬한 일격을 방패로 받아내고 목에 검을 꽂은 게 누구였지?” “그건 아저씨가 맞긴 한데, 사실 오늘의 최고 공로자는 훌륭하게 그 놈을 유인해낸 세토 아니겠어?” 아르버트는 주머니에서 가죽 끈을 꺼내어 메달을 꿰고는 그것을 세토의 목에 걸었다. “세토, 넌 자랑스러운 동료야!” 세토는 기세 좋게 콧소리를 냈다. 자랑스럽게, 아주 뿌듯하게―― “후훗, 나도 너에게 메달 주는 건 찬성이야. 브란덴에게 줘 봤자 어차피 내일이면 술값으로 다 나갈 테니까.” 라미트가 웃으니 브란덴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의 최고 공로상은 세토로 결정! 대단한 아마로라니까, 정말!” 이렇게 세토는 아르버트의 동료로 일행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아므 아랭에 연달아 마물 토벌에 성공하는 모험가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과 만나기 위해 어떤 자가 찾아온다. 바로 미스텔족 사냥꾼 렌다 레이다. 이어서 레이크랜드에서는 명문 귀족 자제의 행방불명 사건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은회색 머리칼의 검사 실바를, 다시 방문한 아므 아랭에서는 같은 의뢰를 받은 라이벌인 고독한 마도사 나일베르트를 만나고, 동료로 맞이했다. 동료는 늘어나고 여행은 계속되었다. 힘들기도 했고, 괴롭고 슬픈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낮잠에서 깬 세토는 목에 걸린 메달의 무게를 느끼고 작게 콧소리를 냈다. 한번은 잃어버렸던 메달이다. 마을에 접근해온 떠돌이 죄식자를 격퇴할 때, 몸이 성장한 탓에 맞지 않게 된 가죽 끈이 끊어져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이 찾아다 주었다. 지금 이렇게 목에 걸려 있는 가죽 끈은 리다 란에 있는 요정들에게 부탁해 새로 마련한 것인데 ―― 아무래도 요정들이 꿈꾸는 주문을 걸어 놓았나 보다. 그러니 그리운 꿈을 꾼 것이겠지. 세토는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늙은 몸으로 세계를 누빌 수는 없겠지만 호수 건너편까지는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꿈을 꾸게 해준 “꿈맺음” 요정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가자. 세토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자, 날아보자, 그때처럼 ―― 나이 든 아마로의 작은 모험을 시작해 보자 ――
종막을 바치다
에메트셀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의사당 입구에 울려 퍼진다. 들은 이상 어쩔 수 없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하얀 로브를 입은 다소 몸집이 자그마한 청년이었다. 얼굴에는 14인 위원회임을 나타내는 붉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누군지 물어볼 것도 없다. 동료인 엘리디부스다.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그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자네는 다음 의제인 화산 건에 대해서 알고 있어?” “아, 그래, 대규모 분화가 머지 않았다는……. 딱히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14인 위원회에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어떤 외딴 섬에 존재하는 화산에 불속성의 비정상적 활성화――즉 분화의 징후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섬에는 마을 하나와 광대한 농장이 있다. 분화하면 모든 것이 사라질 테지만……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다른 수많은 예와 마찬가지로 ‘그냥 그런 것’이다. 섬의 주민들도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원한다면 이주를 시작했을 것이다. 위원회에서도 대응을 검토할 예정이지만 그 이상의 결론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안건을, 그것도 엘리디부스가 나에게 가져오다니――안 좋은 예감이 든다. “사실은 아젬이 그 산으로 가 버렸어. 분화를 막겠다면서.” 그것 봐! 라고 외칠 뻔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꾹 참는다. 몇 초 동안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뒤 간신히 “……어떻게?”라고 물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엘리디부스는 여전히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한다. ”자네는 불의 정령 이프리타를 알고 있지?” “……그래. 라하브레아가 만들어낸 이데아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지.” 그러자 우직하게 꾹 다물고 있던 엘리디부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맞아, 그건 정말로 멋지지.”진심을 담아 중얼거리는 모습에서 그가 라하브레아를――그리고 동료들을 얼마나 흠모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평소 같으면 그 모습이 흐뭇하기도, 멋쩍기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불의 정령 이프리타는 불속성 에테르를 한데 모아서 만들어내는 환상 생물이다. 그렇다면 아젬이 어떻게 분화를 막으려고 하는지 상상이 간다. 화산에 가득한 불의 힘을 이프리타의 형태로 바꿔서 끌어낸 뒤 다른 장소에서 흩뜨려 버리려는 것――즉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려면 협력자가 한 명 더 필요할 터. 이프리타의 이데아를 아젬에게 건넬 사람 말이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라하브레아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모든 이데아를 통솔하는 창조물 관리국. 그곳의 국장이라면 아무리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는 이데아라고 해도 갖고 나올 수 있을 테다.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띄우며 아젬을 배웅했을 친구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라 무심코 가면을 쓴 채 이마를 짚었다. 엘리디부스는 그 행동을 보고 용건이 전달되었다고 이해한 듯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사태가 커지면 아젬은 또 질책을 받게 될지도 몰라. 자네가 가줘, 에메트셀크.”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괜찮겠나? 조정자 엘리디부스씩이나 되는 자가 그 녀석 편을 들어도.”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 화산 건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그럼 분화를 막고 싶다는 아젬의 의견도 똑같이 존중되어야 해.” 망설임 없이 단호히 말을 하는 그에게 반론도 긍정도 할 수 없어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젬은 언젠가 자기 시대의 조정자가 이 마음씨 착한 청년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분화를 막고 싶어하는 이유는 들었나?” 자리를 뜨기 전에 그렇게 물으니 엘리디부스는 “아니……”라고 말하며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아젬과의 대화를 신중하게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근거 없이 말하지 않는 것이 그가 조정자가 된 연유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 그는 아주 중대한 사실을 밝히듯이 지긋이 고했다. “그 섬에서 재배되는 포도가 맛있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어……. 섭리를 거스르더라도 포도는 존속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의 두터운 신뢰를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장단을 맞추면서 나중에 이 두 명의 나쁜 친구에게 설교를 늘어놓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런 복잡한 심중을 알 리 없는 엘리디부스는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우더니 “아젬의 견해는 언제나 신선하단 말이야”라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엘리디부스는 그런 청년이었다.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14인 위원회의 동료들을 아끼고 존중하려 했다. 그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디아크를 소환하기로 했을 때 핵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자가 엘리디부스라는 것을 알게 되자 사명감에 불타는 위원들조차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와의 예상치 못한 재회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디아크를 별의 의지로 세우고 종말이라는 재앙을 피한 직후. 미래의 방향성을 놓고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갈렸다. 대부분은 새로운 생명과 맞바꾸어 조디아크에게 바쳐진 동포들을 되찾는 일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새로운 생명에게 별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다. 더 이상 판단을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 돌연 조디아크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잠시 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깜짝 놀란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입가가 어색하게――하지만 분명하게 웃음을 지었다. “괜, 찮, 아……. 자네들은, 바르게 판단 하고, 바른 길로 가게 될 거야……. 엘리디부스가, 그걸, 도와주지.” 그 뒤로 세기도 싫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갈레말 제국의 솔 황제라는 임무를 끝낸 나는 차원의 틈에 떠 있는 어스레한 거점에서 오랜만에 긴 잠에 빠지려 하고 있었다. 솔의 육체는 원초세계에 두고 왔으므로 지금은 그저 망령처럼 형태가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더욱 아주 먼 옛날, 내가 나였을 때의 모습을 취한다. 이 모습으로 잠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연기하던 시간이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유지하는 일이 이제 와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내다 버리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머지 두 사람의 원형 상태를 생각하면…… 내가 계속 고집하고 있는 일에, 감상과는 또 다른 이유가 주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메트셀크, 날 부르는 소리가 울려 겉잠에서 깨어난다. 피곤하니 가만 좀 놔두었으면 싶어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어도, 목소리의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서 또다시 이름을 부른다. 아득히 먼 옛날 자신을 의사당에서 불러 세운 그 목소리…… 그럴 터인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들리는 건 완전히 달라진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로 변질해 버렸기 때문일까……. 아무튼 목소리의 주인――엘리디부스는 옆에 서더니 엄숙하게 고했다. ”라하브레아가 소멸했다.” ――몸을 일으켜 엘리디부스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서로를 감싼 긴 침묵이 뒤집히지 않을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씨엔에게 ‘죽었다’는 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 ‘소멸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우리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엘리디부스의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차오른 숨을 내뱉는다. 그의 말이 맞다. 라하브레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세계를 오가며 신체를 바꿔 돌진할 때마다 그는 스러져갔다. 최근에는 어둠에 의한 재해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아가 그것을 조장하려는 행동조차 보였다. 마치 불꽃 같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의 그가 뛰어난 불꽃 환상 생물을 여럿 만들어냈기 때문일까. 불타오르는 불사조, 불의 정령 이프리타…… 당대의 라하브레아가 만든 불꽃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그 자신 또한 늘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든 후엔 불꽃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엘리디부스를 살핀다. 유일하게 가면이 덮지 않은 입가는 굳게 다물어져 있어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이제는 예전 같이 경애를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마음 자체가 이제―― “……에메트셀크?” “아, 그래…… 라하브레아 노친네는 자신이 만든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만든, 것……” 말을 되새기는 엘리디부스의 얼굴에 이번에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 자신도 또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쥐었다. 그는 조정자로서 14인 위원회 앞에 돌아온 이후――인간이 아닌 소원이 자아내는 ‘무언가’가 된 이후로――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자신 안에 있어야 할 것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었다. “……엘리디부스. 여전히 그 크리스탈을 볼 의향은 없는 건가?” 아직 그가 그 자신이고, 라하브레아가 라하브레아였을 무렵, 그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위원들에 대한 기억을 한데 모아 크리스탈에 담았다. 윤회자를 다시 자리에 앉힐 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엘리디부스에게 사용하면 떠오르는 기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엘리디부스이고 해야 할 일과 그 방법을 기억하고 있어…… 그걸로 충분해. 이것저것 떠올린들 전투를 거듭하다가 또 잃어버리게 될 거야. ……소중한 기억이라면 여러 번 잃어버리지 않게 해줘.” 그걸 원한다면 역시 반론도 긍정도 할 수 없다.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고 이야기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송 마법을 쓰면서 내게 고했다. “지금부터 난 원초세계로 돌아가 라하브레아를 궁지로 몰아넣은 영웅을 처리할 거다.” “알겠어. 뭐, 상대가 ‘영웅’이라면 네 적은 아닐 테지.” “하지만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까. 이 위태로운 시대를 빨리 끝내기 위해 그쪽도 활동을 계속해줘.” 아니, 난 좀 쉬고 싶어―― 말을 뱉기 전에 그의 마법이 발동되어 그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직접 만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마법은 모두 부스러지고. 남은 것은 내 존재뿐이다. 그마저도 무너져,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되돌아간다. 이제 숨조차도 쉴 수 없다. 그 정도의 전투였다――그래야만 했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 싶은 소원이었으니까. 몇 번이나 ‘봐’왔듯 에테르가 명계로 흘러 들어간다. 그 흐름 속에서 아주 긴 과거를, 그리고 찰나의 미래를 생각한다. 결말은 내 손을 떠났다. 하지만 배우들은 아직―― 몹시도 기묘한 형태로―― 무대 위에 모여 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막을 내려야 할 곳은 지금 이곳은 아니리라. 더 이상 형태도 남지 않은 손으로, 그럼에도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낸다. ――보시라,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를.
서막에 노래하다
역사라는 것을 둘러보면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를 세운 누군가. 역사적인 발견을 한 누군가. 곤경에 빠진 민중을 구한 누군가――그렇게 밤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과 같은 사람들을 위인이나 천재 혹은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겠지. 나는 영웅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회장’이다. 18대째 내려온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18번째 회장. 초대 회장을 비롯한 몇 명은 운 좋게도 살아 있을 때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짧게는 취임 후 3일만에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 그렇게 약 200년…… 이 자리에 앉았던 18명은 후세에 전해진다 해도 ‘초대 회장 시드와 그의 뒤를 이은 회장들’ 정도로 기록되는 게 고작일 것이다. 우리가 완수하려고 하는 것이 형체가 없는 위업이라면 더욱. 이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는다. 영웅도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래도 우리들은 당당히 살고 있다. 은빛눈물 호수에 우뚝 솟은 ‘묵약의 탑’. 거창한 이름이지만 탑처럼 보이는 그 거대전함은 도굴꾼들이 장갑이란 장갑은 모조리 떼어간 탓에 이제는 고목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자못 폐허와도 같은 그 분위기는 은신처로 삼기에 매우 적절했다. 호수 한가운데에 있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적이 습격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겨진 탑의 외관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호스……아니 ‘용’은 그 영웅과 인연이 있는 존재였다고 전해지니 우리들이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밤, 그 은신처 중앙에 있는 집회장에는 갈론드 아이언웍스 사의 사원들 및 협력자들이 푹 잠들어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한밤중까지 작업장인 크리스탈 타워에 있었지만, 오늘밤엔 그럴 필요가 없다. 준비는 이미 다 마쳤고 내일 아침 저 탑은 과거의 제1세계로 출발할 예정이다. 이를 기념하면서 열린 조촐한 연회도 이미 한참 전에 끝났지만 끝내 아쉬움에 자리를 뜨지 못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코를 골고 있다. 하나 남은 모닥불은 그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붉게 타고 있었다. 잠들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건 나와 또 다른 한 명뿐이다. “이봐, 그라하……” 이름을 부르니 불꽃처럼 붉은 눈이 이쪽을 향했다. 그는 그 붉은색 때문에――알라그 황족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이 시대까지 잠들어 있던 그는, 내일 다른 시대로 떠난다. 이번에는 세계마저 뛰어넘어, 희망을, 그리고 다른 미래를 전하기 위해. 그 무거운 책임을……우리가 그에게 맡긴 사명의 무게를 생각하면 언제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친다. 하지만 각오는 이미 서로 다진 터였다.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몇 마디를 도로 삼키고, 대신에 전부터 물어보려고 했던 이야기를 오늘은 기필코 물어보기로 한다. “자네는…… 어째서 크리스탈 타워와 함께 잠들었지?” 그렇게 묻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거린 뒤에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걸 묻는 거야?” “마지막 기회니까. 그야 물론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이었을 거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도 생각해. 우리들의 꿈이 이어진 것도 그 덕분이고. ……하지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아니었을 텐데.” 예전부터 그에게 갖고 있던 의문을 솔직히 털어놓자, 그도 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는 듯했다. “글쎄……”라고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불꽃으로 돌렸다. 대답을 고르는지 꼬리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이내 그가 얼굴에 미소를 띤다. 가늘어진 눈은 불꽃의 빛 너머에 있는 좀 더 눈부신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영향을 받은 거야, 그 열의와 빛에.” “……뭐라고?” “시드와 네로, 그리고 웨지와 초대 빅스. 모두 머리도 실력도 기가 막히게 좋아서――” 자신이 지식을 하나 말하면 그들은 순식간에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곁에서 조사를 지휘하던 람브루스 역시 현인으로서는 대선배다. 감시자라는 큰 임무를 맡아 들뜬 젊은이를 내심 흐뭇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인정하고 의지해줘서 기뻤다. 도중에 조사에 합류한 도가와 우네는 놀랍게도, 알라그 시대에 태어난 클론이라지 뭔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오로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 했다. 그런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건 고대 알라그 문명의 지혜와 어둠. 알라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 전설의 시황제 잔데, 끝내는 세계를 건너 대요마와 결전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노아의 길을 개척한 사람―― 제8재해의 세상에도 이름을 남긴 바로 그 영웅이다. “정말 대단하다니까.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이 된 것 같아서…… 정신없이 빠져들었지. 그러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겠어?”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지만……두려움은 없었나?” “그야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라하 티아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광장 중앙의 천장은 비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보강되어 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구멍투성이라 검게 튀어나온 뼈대 사이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보였다. 그 빛을 눈에 담고 그리움을 가득 드러내며, 자랑스럽게 그가 말한다. “어떤 운명이든 도전할 수 있겠다. 그런 믿음이 생겼어. 그 녀석들과 함께 달리고 있을 때.” 망설임 없는 옆얼굴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 저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게 영웅이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의 선조도, 초대 회장도, 이 계획에 관여해온 많은 사람이 그 존재를 접하고 가슴을 애태웠다. 과연 본인에게 자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걸음은 한때 함께 걸었던 누군가에게 분명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앞으로, 미래로, 희망으로 나아갈 용기를. 그것이 내일 아침, 그 누구도 아닌 내 시대에서 결실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시니, 등이 곧게 펴졌다. “……전송은 반드시 성공시킬게.”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내미니 내 것에 비해 상당히 작은 주먹이, 그러나 힘을 가득 실어 부딪혀온다. “그래. 그다음은 내게 맡겨.” 설령 이 약속의 끝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하나라도 더 많은 행복이 생기길 기원하며, 다음 날 아침, 크리스탈 타워의 전송 계획이 실행되었다. 바라건대, 두 세계가 모두 구원받기를.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또한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결말이 되기를. 동료들의 진심 어린 배웅 속에, 아름다운 수정탑은 새벽하늘에 잔광을 흩날리고는 사라졌다. 모르도나의 호수에서 동료들과 얼마나 서 있었을까. 크리스탈 타워가 전송되었을 때는 다소 어둑했던 하늘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각자 그저 사라진 탑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획은 시간과 차원 너머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탑이 사라진 모르도나의 풍경처럼, 내 안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그로 인한 적막감이 그 구멍을 채운다. 200년에 걸친 꿈의 끝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바람과 호수에 이는 미세한 소리만이 귀에 남았다. “……안 사라지네, 우리들은.” 동료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며 정적을 깬다. 역사를 바꾸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성립시킨 순간에 이 역사가 통째로 ‘없었던 일’이 될 가능성조차 있었다. 하지만 탑을 보낸 후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여기 존재하고 있다. 그라하 티아가 제1세계의 구제에 실패하면 애초에 역사가 바뀌지 않을 테지만……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믿고 싶다. 그는 계획을 완수하고 제8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역사를 성립시켰고, 한편으로 우리의 역사도 이대로 계속된다……고. 동료들도 같은 생각에 이르렀으리라. 서로를 바라보며 이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기 시작했다. 변한 건 없다. 아무것도. 이 진흙탕 같은 세계에서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당연하고도 뻔히 알고 있던 결말에 이른 것이 우스웠고―― 그리고 묘하게 행복했다. 그렇게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크리스탈 타워. 시간의 날개. 차원의 틈을 뛰어넘은 관측자. 그 많은 모험으로 이어진 이 역사에는 아직 눈을 떠야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긴다. 동료 중 한 명이 “저기야!”라며 은신처 쪽을 가리켰다. 뒤돌아보고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폐허가 된 전함에 남아 있던 녹슨 장갑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장갑 몇 개가 벗겨지더니 호수에 그대로 떨어져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킨다. 원래부터 무너질 것 같은 폐허이긴 했지만, 드디어 한계가 온 것일까. ――아니다. 외관을 휘감고 있던 ‘그것’이 마치 되살아난 듯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환룡……미드가르드오름……!?” 다시 하늘까지 뒤흔들 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의 포효였다. 이윽고 폐전함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거대한 용은 하늘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하필이면 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동료들과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 용이 죽은 건 아니라는 사실은, 초대 회장이 남긴 차원의 틈에 관한 조사 기록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눈을 뜨다니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혹시 크리스탈 타워를 전송한 게 그의 잠을 방해한 건 아닐까 생각하니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우리를 둘러보던 미드가르드오름이 낮고 조용히 소리를 냈다. “그대들, 작은 인간이여…… 조금 전 수정탑을 차원의 너머로 보냈구나.” “아, 그래…… 미안, 그것 때문에 잠을 깬 건가……?” 용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쥐고 있던 주먹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괜찮아, 그는 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되뇌어도 본능적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드래곤족이란 이런 건가, 실감하면서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선잠을 자면서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들 인간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도 말이다.” 태초의 용은 담담하게 말하더니 다시 한번 우리를 둘러보았다. “나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대들이 한 일이 용감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하물며 그 마음의 변화는 우리 용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없어질 꿈이라고 생각했으나……그대들은 해냈다.” 그리고, 라고 말하며 그 거대한 눈이 동료 중 한 사람을 담았다. 젊은 그녀는 양손으로 검은 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나의 선조가 만들었다는 오메가의 모형이다. 오랫동안 갈론드 아이언웍스의 일원으로 사랑을 받아왔으나, 아무래도 긴 세월 탓에 여기저기 고장 난 곳이 많았다. 배터리를 갈아도 금방 멈추고, 센서에도 이상이 생겼는지 자주 은신처의 벽에―― 그야말로 미드가르드오름의 몸통에 쿵쿵 부딪히곤 했다. 완벽하게 수리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만드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즈음엔 이미 탑의 전송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점이라 일단 계획을 끝낼 때까지는 그대로 두자고…… 다 같이 정했었다. 그 모형을 본 미드가르드오름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용의 표정은 전혀 모르지만, 기분 탓인지 왠지 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나도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그 광경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저 온몸에 다시 피가 돌기 시작했고 그것이 엄청나게 뜨겁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어젯밤 들었던 말이 울린다. “영향을 받은 거야”라. 그래, 그건 이런 감각이었을까. 무언가 웅장한 흐름에 몸을 던지는 듯한, 모든 일의 시작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약간의 불안함과 흥분. 그 감각에 떠밀리듯 조금 전까지 두려워하던 용을 똑바로 응시한다. 용도 역시 비늘을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이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인간이여, 그대들의 꿈은 여기서 끝인가?” “……아니, 우리는.” 제8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미래를, 그 영웅이 살아 있는 미래를 성립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 갈고 닦은 기술은 분명히 이 손에 남아 있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키워온 그것은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구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구하고 싶다, 이 세계를.” 그 대답에, 역시 미드가르드오름이 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이 별에 사는 자로서 그대들의 소원에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나를 단단한 성벽으로 삼아 도시를 짓고, 나아가 지혜를 쌓도록 해라. 그리하면 언젠가는 올 것이다――새로운 평화의 시대, 인간이 성력이라 부르는 것이.” 용의 말에 수긍하면 우리의 다음 전투가 시작된다. 시간과 세계를 건넌 그 청년도 그의 전장에서 분투하고 있을 터. 그 결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의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더라도. 우리는 분명 똑같이, 저 너머의 별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