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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못다 한 이야기

칠흑의 반역자편에 등장한 인물들의 미처 말하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들을 공개합니다!

그 이름에 소망을 담아

이곳 림사 로민사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녀석일수록 흰색을 몸에 걸치지. 그래야 거리에 잘 녹아 들거든. 머리색이 흰색인 넌 날 때부터 악당에 적격이었단 소리야―― 아직 앳된 모습이 남은 어린 산크레드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남자는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는 아니다. 철들기 전 부모에게 버림받아 거리에서 살아온 소년과 그를 헐값에 고용해 악행에 가담시키려는 상인…… 단지 그뿐인 관계다. 때는 아직 멜위브의 해적 금지령이 선포되기 전. 강한 힘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이 바다의 도시에 상인을 노려보며 아무 말 없이 분을 삭이는 소년을 염려해주는 이는 없었다. 악랄한 고용주가 있는가 하면 조금은 나은 고용주도 있었다. 쉬운 일을 받아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 다음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의뢰 받은 일이 끝나면 끊어지는 인연…… 그런 관계를 거듭하면서 산크레드는 성장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에겐 탁월한 재주와 민첩성, 뛰어난 기지가 있었기에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해적들조차 두려워하는 ‘규율’의 파수꾼, 도적 길드에 붙으면 편해질까 싶어 협력하기도 했지만, 그곳에 적을 둘 생각은 없었다. 그들 안에 내밀히 불타는 긍지심과도 같은 그것은, 산크레드에게는 함께 나누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떠돌이와 다름 없던 그의 생활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게 된다. 원양어선이 들어오던 그날, 산크레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두에서 한 건 올릴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도둑질이다. 그리고 기품 있어 보이는 어떤 노인의 짐에 손을 대다가…… 되려 호되게 당하고 만다. 마법으로 손발이 묶이고 하얀 돌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관청에 잡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사람을 부르기는커녕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하는 구경꾼을 흩어지게 하더니, 너무나도 살갑게 산크레드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내 이름은 루이수아 르베유르라고 하네. 지식의 도시 샬레이안에서 연구를 위해 이곳에 왔지. 자네 이름은?” “……산크레드.” “성은 뭐지? 가족은 어디 있나?” “없어…… 몰라…….” 루이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몹시 중요한 사실을 밝히듯이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산크레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타고난 민첩함과 재주를,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써보는 게 어떤가. 그것이 언젠가 자네를 행복하게 할 걸세―― 산크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찌푸린 얼굴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난처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루이수아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샬레이안으로 가서, 그 재능을 살릴 방법을 배우도록 하게―― 이렇게 해서 산크레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이수아는 그에게 임시로 ‘워터스’라는 성을 주었다. 하천과 지식을 관장하는 살리아크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샬레이안에서 ‘물’은 지혜의 상징이다. 산크레드가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는 루이수아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산크레드를 첩보 활동의 명수에게 맡기기로 했다. 끊임없이 세상의 지식이 모여드는 샬레이안 본국에서는 첩보 기술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 길이라면 산크레드의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산크레드 역시 일찌감치 자신의 입지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은밀한 행동을 위한 신체 기술은 물론, 어떠한 환경에도 잠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몸가짐과 지식을 최대한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그에게서 거리 생활을 하던 소년의 면모가 사라지고, 누구에게든 접근해 환심을 살 수 있을 만한 초연한 청년의 모습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목덜미에는 탁월한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아 ‘현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문신이 새겨졌다. 오랜만에 만난 루이수아는 그것을 몹시도 기뻐했다. 당시엔 아직 ‘아실리아’라 불리던 소녀와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루이수아가 결성한 ‘구세시맹’의 일원이 된 산크레드는 에오르제아에 점차 전란이 다가올 조짐이 보이자 밀명을 띠고 울다하에 와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검술을 배우기 위한 유학이었지만, 실제로는 야만신에 대한 지식을 협상카드로 내밀며 국가의 중심부에 접근해 급격하게 국력을 키우고 있는 갈레말 제국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비참한 ‘사고’로 인해, 그 소녀는 산크레드의 눈앞에서 천애고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유해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아실리아를 봤을 때의 감정을 어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린 소녀가 딱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고, 그럼에도 “갖은 수를 써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도 같다. 그게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기술을 익히고도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그저 좌절한 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형용하기 어려운 그 감정은, 그럼에도 하나의 단어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원통함이었다. 하지만 아실리아에게는 다행히도 프라민이라는 보호자가 생겼다. 사실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는 산크레드가 그녀에게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제국군의 이중 첩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적어도 당시의 산크레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우선해야 할 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지만 울다하에 있을 때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러 갔고, 그녀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사전에 ‘골치 아픈 작자들’을 손보러 가기도 했다. 그 상대가 길거리 불량배 정도면 다행이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인지 그녀 주변에서 어슬렁대는 제국 스파이를 발견했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 산크레드는 아실리아에게 당분간 다른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네 머리 색처럼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아실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어떤 이름이 좋겠어?”라고 산크레드에게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산크레드는 ‘민필리아’라는, 고원 부족치고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흔하지는 않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언젠가 루이수아에게 받은 자신의 성처럼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진 않았지만, 온종일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자신을 대신해 그녀를 보호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아실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 이름을 받았다. 어느 날 밤, 정보도 수집할 겸 술집으로 향하던 산크레드는 어스레한 울다하의 길을 걷는 민필리아를 발견했다. 곡괭이를 지고 있는 걸 보니 채굴하고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민필리아, 어쩐 일이야? 평소엔 조금 더 빨리 끝나지 않아?” “어머, 산크레드. 오늘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좀 늦게 끝났어.” 어깨를 으쓱하는 민필리아에게 “데려다 줄게”라고 말한 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민필리아와 프라민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은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오늘 있었다던 문제의 자초지종을 듣기도 하고 최근에 들은 시시껄렁한 소문 이야기에 웃기도 하다 금세 도착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이제 술 마시러 가는 거야?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너무 취하면 금세 여자들한테 집적대잖아……” “네네...... 단단히 새겨 듣지요.” 산크레드의 성의 없는 대답에, 민필리아는 “어휴!”하면서 토라지고는 문을 밀어서 열었다. 안에서 따뜻한 주황색 빛이 퍼져 나와 산크레드와 어두운 길을 함께 비추었다. 민필리아가 손을 흔들며 그 빛 속으로 사라지자—— 찰나의 정경을 가르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이 닫혔다. 조금 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어머, 이제 오니?” 다시 어두워진 길에서, 산크레드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거의 어둠에 녹아 들어, 표정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미적미적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저 문 너머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 역할은 기껏해야 그녀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니까. 그것은 사사로운 그의 고집이면서—— 그럼에도 깰 수 없는 그의 긍지였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산크레드는 사정이 있어 제1세계로 왔고, 지금은 환락도시 율모어의 지하실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이곳에 유폐되어 있다고 하는 어떤 소녀를 구출하기 위해서다. 이 도시의 건물들은 하얀 암초로 지어져 있어, 아닌 줄은 알지만 림사 로민사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자신을 고용했던 악덕 상인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녀석일수록 흰색을 걸치지.” 산크레드는 변장을 위해 입고 있던 율모어 군의 갑주를 벗고 순백색 코트로 갈아입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강화섬유로 만들어져 온갖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이 코트는, 쌍검에서 건블레이드로 바꾸면서 방어 역할을 하게 된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수한 장비였다. 흰색을 선택한 건, 빛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보호색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떳떳한 기사였다면 일부러 칠흑 같은 검은색을 걸치고 이 도시에 정면으로 대치했을까? 하지만 그는 바로 생각을 바꿨다. 중요한 건 방식이 아니라, 결과다. “그녀”를 어떻게든 구해내야 해. 율모어를 형성하고 있는 거대 암초는 물론 바다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뚫어서 만든 넓은 지하 공간은 어떤 시대에는 비축 창고로, 또 어떤 때에는 죄식자를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대피소로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우스리가 원수로 취임한 이후 현재는 감옥이자 메올을 비롯한 식량을 쌓아두는 저장고로 쓰이고 있다. 그 가장 안쪽 끝에 소녀의 방이 있다는 건 사전에 면밀한 조사를 통해 알아냈다. 산크레드는 감시의 눈을 피해 안쪽으로 진입하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방해가 될 법한 자는 미리 졸도시킨 뒤 얼마간 움직일 수 없도록 포박해 두었다. 사실 아무리 율모어의 경비가 엄중하다 해도, 혼자서 드나드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면…… 게다가 그 대상이 아마도 전투 경험조차 없을 소녀라면, 난이도가 한층 높아질 터. 그가 제1세계에 온 뒤 작전을 결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건블레이드 수련을 포함해 ‘둘이서’ 탈출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번째인지 모를 파수병 처리를 끝내고, 산크레드는 드디어 방 앞에 이르렀다. 이 안에 있는 소녀는 제1세계 사람들에게 ‘빛의 무녀 민필리아’라 불리고 있지만, 산크레드가 알고 있는 그녀 그 자체는 아닐 것이라고 수정공은 말했다. 하지만 실낱 같은 부분이라도 그녀에게 닿아 있다면 ―― 난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산크레드는 작게 숨을 내쉬고 재빨리 문에 걸려 있는 열쇠를 풀었다. 그 방은 너무나도 평범하여 도리어 이상해 보였다. 간소하면서도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작은 수납장. 한 벌로 된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공부라도 하고 있었는지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책장이었다. 종류별로 빼곡하게 빈틈없이 책이 꽂혀 있었다. 지하라서 창은 없었으나 불만으로 여길 만한 건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겨우 붙잡은 ‘빛의 무녀’를, 절망도 희망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사육하기 위한 장소라는 걸. 방 가운데에 있던 소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방문객을 향해 수정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있었다. “누, 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목소리는 산크레드가 아는 민필리아하고도, 어린 아실리아하고도 달랐다. 무의식 중에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애써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여길 나갈 거다…… 민필리아.” 그 이름에 담긴 소망을 떠올린다. 그날, 내 눈앞에 분명히 존재했던 소녀의 미소를 떠올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잊지 않겠노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마음속에 새긴다. 그렇게 내민 손을, 소녀의 작은 손이 주저하며 잡았다. ――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인연에 이름은 아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