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제7재해는 에오르제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각각의 인물들이 겪었던 제7재해를 5화에 걸쳐 돌이켜보겠습니다.
'영광의 승리호'
'흑와단 전군에 고한다. 지금 이 시각 이후로 모든 명령을 철회한다. 모든 대원은 각자 판단 하에 퇴각하라!' 씁쓸한 결단이었다. 바다의 도시 '림사 로민사'의 총사령부 '흑와단'을 이끄는 제독 멜위브 블루피쉰은 카르테노 평원에서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달의 위성 '달라가브'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오르제아 열두 신을 불러내려던 작전은 갈라진 위성 안에서 나타난 '검은 야만신'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현자 루이수아가 끝까지 신을 불러내려 했으나 전선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그리고 본대는 뒤에 남아라. 특수지상부대 모험가들을 먼저 철수시켜!' 대의를 위해 함께 싸워준 모험가들을 생각하며 이 같은 명령을 내린 멜위브는 곧이어 자신이 아끼는 초코보 '승리호'에 올라탔다. '에인차! 나는 본대와 함께 가서 퇴각을 지휘하겠다! 너는 퇴로를 확보하고 탈출한 부대와 합류해서 전열을 정비해라!' 이럴 때 평범한 부하라면 위험한 임무에 나서려는 제독을 말릴 것이다. 하지만 에인차 슬라퓌어쥔은 자신의 상관이 냉정하게 판단하여 내린 결정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례하며 떠나 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멜위브가 그를 부하로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 몸집이 큰 '데스트리어 종' 가운데서도 유난히 체격이 좋은 초코보 '승리호'는 늠름한 두 다리로 전장을 누볐다.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에 깃든 두려움조차 주인을 위해 꾹 참아낼 줄 아는 훌륭한 초코보였다. 그러나 승리를 기원하며 붙여진 이름에 걸맞은 상황은 아니었다. 에오르제아 동맹군은 패배하여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멜위브는 혼란에 빠진 아군 부대를 찾아내어 퇴각을 지시했다. 그러던 중, 퇴각중인 부대를 거슬러 제국군 부대에게 맹렬히 달려드는 부대를 발견했다. 해적세력을 모아서 만든 타격지상부대에 속한 자들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물러서! 승부는 이미 결정 났다!' 소리치는 멜위브에게 맞선 사람은 3대 해적단 중 하나인 '홍혈성녀단'의 두목 로즈웬이었다. 여해적은 아름다운 미스릴빛 권총을 치켜들고 외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동료가 몇이나 죽은 줄 알아! 제국군 이 개자식들 죽여버리겠어!' 동료를 잃고 격분한 로즈웬은 오로지 피와 복수에만 빠져있었고, 그런 그녀를 설득해서 돌려보낼 도리가 없었다. 말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제국군의 후속 부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멜위브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 '죽음의 징벌'과 '섬멸자'를 뽑아 들고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한 발, 두 발…… 쌍열식 권총에서 총알을 쏘아대며, 적군의 보병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세 발, 네 발…… 연달아 총을 쏘아댔지만 적은 너무나도 많았다. 심지어 뒤쪽에서 검게 빛나는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몸집이 큰 '승리호'보다도 더 커다란 그것은 제국군이 자랑하는 기병무기 '마도 아머'였다. 마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처럼 입 모양의 철갑이 열리며 거대한 포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멜위브는 마도포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윽!!' 재빨리 '승리호'의 옆구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겨우 직격탄을 피한 순간 코앞에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폭발음 때문에 귀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묘한 정적 속에서 멜위브는 자신의 몸이 쓰러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 쪽이 따뜻했다. 피다. 하지만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제국군이 쏜 탄환이 초코보 갑주를 뚫고 '승리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눈을 뜬 멜위브가 처음으로 본 것은 낯익은 선실 천장이었다. 흑와단 기함 '정복호'의 후미에 만들어진 선장실이었다. '제, 제독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대장, 대장님!' 의무병처럼 보이는 사내가 뛰어나가더니, 잠시 후 덩치 큰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며칠이나 지났지? 현재 상황은?' '이틀입니다……. 지금은 멜토르 해협 위에 떠 있고, 보시다시피 정복호 안입니다' 에인차는 지금껏 일어난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제국 병사가 쏜 총을 맞고 '승리호'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과 초코보와 함께 쓰러질 때 머리를 세게 부딪쳐 정신을 잃은 그녀를 해적단 '단죄당' 무리가 후퇴하며 들쳐 업고 왔다는 것도 말이다. 참고로 로즈웬은 마지막까지 맞서 싸우려 했지만 평소에는 대립하고 있었을 '백귀야행' 두목 카르발랭이 억지로 자신의 초코보에 태워 납치하듯 끌고 나왔다고 한다. 마치 이슈가르드 기사처럼 화려한 손놀림이었다고 하니 놀랄 일이었다. 이 일이 꽤나 굴욕적이었는지 로즈웬은 지금까지도 카르발랭을 '겁쟁이'라며 욕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철수한 흑와단 장병들은 다른 동맹군 부대와 함께 다날란까지 물러선 뒤 부대를 재편성했다. 지금은 저녁별 만에 정박해 두었던 함대에 나눠 타고 '림사 로민사'로 향하는 중이라고 했다. '울다하 연금술사 녀석들은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한다면서 제독님을 못 데려가게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독님도 기울어진 배를 버리고 도망친 선장이란 소리는 듣기 싫을 거 아닙니까?' 멜위브는 고향 '림사 로민사'를 종종 배에 빗대어 '거함'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 ‘거함’의 선장이자 제독인 그녀가 재해를 입은 고향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라는 에인차의 판단이었으리라. 그녀 역시 의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크게 다쳤을지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이심전심으로 자신의 뜻을 헤아려 움직여주는 부하가 있어 든든했다. '그래서, 그자는 무사한가?' 멜위브는 자연스레 질문을 던졌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눈치 빠른 부하답지 않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자라니요? 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물러서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분명 '누군가'가 무사하길 바라며 제일 먼저 그 자를 도망치게 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그게 누구지? 이 당연한 사실이 기억나지 않자 멜위브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머리를 세게 부딪힌 탓에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에인차의 말에 스스로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 뒤로 며칠이나 휩쓸리듯 지나갔으니 말이다. 고향 바일브랜드 섬에 다다른 함대는 바다 위를 떠다니던 몇 사람을 건져 올렸다. 갈라디온 만에 떨어진 달라가브의 파편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 휩쓸린 자들이었다. 게다가 함대를 이끌어줄 '시리우스 대등대'에는 섬뜩한 주황빛 크리스탈이 달라붙어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신의 손아귀 곶이 '모라비 조선소'를 파도로부터 지켜낸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멜위브는 이 항만 시설에 '정복호'를 비롯한 남은 함선을 한데 모은 뒤, 임시 지휘소를 세우고 곧바로 재해 복구 지원 함대를 편성하여 보냈다. 구해낸 생명도 있었지만, 끝내 구할 수 없었던 생명도 있다. 잠잘 틈도 없이 구조활동을 지휘하던 멜위브였지만, 머리 한구석에선 줄곧 '누군가'의 존재가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최선을 다해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이 흘러, 모라비 조선소 임시 지휘소가 해체되고 '림사 로민사'에 지휘권을 넘기는 날이 찾아왔다. 이제 모라비 조선소는 원래대로 '배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그 첫 번째 배로써 흑와단의 군함을 만들기로 결정되었다. 새로 만드는 배에 이름을 붙여 달라는 부탁에 멜위브는 망설임 없이 '승리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날 쟁취하지 못했던 승리를 이번에야말로 손에 넣기 위하여.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누군가'와 함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